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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시대: 길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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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040

[경향 돋보기 -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시대] 길을 찾는 사람들


“믿는 이들은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가진 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2,42-47; 4,32-35 참조).

예수 운동이 지상에 아버지의 나라 건설이었다는 입증은 ‘예루살렘 부활공동체’ 현상에서 알 수 있다. ‘사도행전 공동생활’의 기록은 삶의 성찰과 함께 다가오는 종말을 준비하는 대안의 삶이었는데, 그런 삶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추종하는 이들에 의해 나타났고, 스승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실천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이야기가 전설이나 소설이 아니라면, 21세기 혼돈의 시대를 사는 우리도 한 번 정도는 도전해 볼 수 있는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더구나 신앙인으로서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복음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모델대로 살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신앙고백이자 은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9년 전부터 필자가 주도하고 있는 ‘산위의 마을’ 공동생활은 그런 믿음을 바탕에 두고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결과로 공동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면, 우리는 거꾸로 공동생활을 진정한 제자의 삶의 한 가닥으로 규정하고 본받아 살아감으로써, 성령으로 하나 되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목마른 사슴의 눈빛을 바라보며

산위의 마을 생활은 가진 것을 내어놓고 한솥밥 식구로 사는 무소유의 경제, 기도와 노동, 생태주의 생활과 자녀교육 등인데, 그 어느 것 하나도 쉽지는 않다. 그래도 뭔가 매력 있게 보이거나 생각이 있으면 한번 ‘와서 보시오!’ 하는 마음으로 다달이 7박 8일의 단기입촌 기회를 주고 있다.

매번 5-10명의 청장년과 더러는 해외 교민들도 찾아온다. 꼭 입촌할 생각보다는 탐색과정이거나 귀농귀촌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다. 오전에는 밭일을 함께 하고, 오후에는 공동체 영성 강의를 듣고, 복음묵상을 나누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서로 대화하기도 한다.

단기입촌자들의 눈빛에는 어떤 좌표를 찾고 있는 두리번거림이 있다. 현대 도시생활이 사람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공감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를 찾는 눈빛들이다. 그리고 한결같이 극도의 피로감에 쌓여있다는 느낌이 든다. 극렬한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서도 무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병사를 보는 듯하다. 그들은 지친 몸으로 생수를 찾고 있다! 목마른 사슴의 순한 눈빛으로.

목마른 사슴들이 본당 전례에 참석한다. 그들은 희망의 소식과 함께 치유의 은사를 갈망한다. 말씀은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예수님은 병자를 앞으로 나오게 하시어 손을 얹어 치유하신다. 마귀 들린 이를 포박하고 있는 악령을 응시하며 추방하신다. 그 일이 사목자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사목자는 그들의 눈빛에서 어떤 질병과 악령에 포박되어 있는지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피로증후군 사회

생활에서는 평범한 듯 보이지만 내면과 영혼은 부상투성이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은 전형적인 ‘피로증후군 사회’의 특징이고 진행성 우울증의 대표적 증상이다. ‘당신에게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돈, 월소득 문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근본의 문제는 돈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소비문화의 생활’과 ‘자기 노예화’ 그리고 ‘노동의 상실’에 있다.

소비문화 생활은 왜 돈을 벌어야만 하는가의 문제이고, 자기 노예화란 집단 우울증에 이른 구조의 문제이고, 노동의 상실은 돈을 벌지 못한다고 우울증까지 앓아야 하는가의 문제다. 이 세 가지 문제를 풀어야만 진정한 창조적 삶을 복구할 수 있다.

소비문화 생활 … 먼저 ‘소비문화 생활’을 점검해 보자. 소득이 얼마건 간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소득의 십일조가 가족들의 통신비로 봉헌된다. 주거와 차량 유지, 외식과 자녀교육비에 이르면 이제 계산할 것조차 없게 된다. 그렇지만 정밀 관찰을 해보라. 정말 필요한 지출인가? 다른 길이 없었는가? ‘반드시’가 아닌데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치스러운 것도 아니고 가족을 위한 소박한 지출인데 그것을 줄이자고 하는 것은 가장과 부모의 자존심에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것이다.

바로 그것이 악령의 마술 작용이다. 행복과 직결되는 어쩔 수 없는 지출 성격으로 강요하는 것이 현대 소비사회의 착취 구조다! 착취하는 자는 누구일까? 바로 자신들이다. 모든 것을 정당한 기본 지출로 보는 도시생활이 바로 현금 인출의 결제 버튼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놀랍게도 ‘세계 금융자본’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다!

금융자본이란 말은 너무 거창한 듯하고 논리의 비약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들의 탐욕과 숨결에 따라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투자가 없는 제품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세상을 다 집어먹어도 채워질 수 없는 탐욕의 악령들에 의해서 약탈을 당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에 자발적으로 동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기술문명에 의지하고 사는 삶의 현상이며, 특별히 이른바 금융자본주의 세계화에 가담하여 스스로 선진국이라 착각하는 모든 글로벌 사회의 공통적인 문제다. 우리가 무슨 수로 밑 빠진 독을 채울 것인가?

자발적 노예의 삶 … 두 번째는 스스로 자기 노동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자기 노예화의 문제다. 과거에는 기업주가 노동자에게 강제노동을 시키고 임금을 착취했다. 이제는 민주화도 성취했고 경제도 성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직장인들은 퇴근도 휴가도 반납하고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물론 특근수당 때문이다. 종용받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이고 인정을 받고자 한다. 이른바 ‘성과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성과주의란 자기 성과를 스스로 증명하고 책임지고 거기에 맞는 보수를 받는 시스템이다. 성과가 좋으면 높은 성과급이 주어지고 그렇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의 정의다. 너무나 공평한 자율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자기 노동에 대한 주인이고 기업주가 된다. 그래서 자신의 노동에 압박을 가하면서 자신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착취한다! 오직 성과를 내기 위해서! 그러므로 삶의 피로가 누적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게임이 공정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과란 개인의 창의와 능력보다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출신 연고, 혈연이고 학연이고 정치적 배경으로 기회를 얻은 자는 성과를 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애써도 쭉정이뿐이란 사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쨌건, 성과주의 체제에서 성공한 자는 더 큰 성과를 낳고 부유층이 될 수 있다.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돈이 쌓이고 무한 사치와 향유의 생활이 주어진다. 자녀들은 좋은 교육 기회와 특혜를 차지하고 다음세대의 상류층을 이어갈 것이다. 반면 성과를 내지 못한 자는 연전연패의 박탈감으로 피로가 누적된다. 음주량이 늘고 신용불량의 위기와 도박에 빠져들고. 중독, 우울증, 이혼, 가정파탄, 암, 노숙, 자살…. 정말로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 불확실하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 떼가 몰려든다.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우울증과 심리정신 치유산업이 뜨게 된다. ○○상담 전문, ○○치료 등이 그러한데, 속임수는 아닐지 몰라도 결국은 전문지식을 사칭한 장사꾼들이요 착취 행위일 뿐 결코 치유가 아니다. 오죽하면 스타 강사인 행복전도사 부부가 스스로 자살을 택했을까? 사회 자체가 정신분열과 우울증에 걸려있는데 누가 누구를 치유한단 말인가? 우울증의 원인을 개인의 삶에서 찾아내려는 분석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사목자는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 인간다움의 성사 … 세 번째 ‘노동의 상실’이란 육신의 건강성 문제다. 육신적이건 정신적이건 건강하다는 말은 ‘정상적 기능의 작동’을 의미할 것이다. 현대인들의 몸은 정상 작동이 멈춰버렸다. 기계를 이용하면서 퇴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암 발생은 감기처럼 흔한 질병이 되었고, 정신은 충격에 허약해졌다.

모든 존재는 자정 능력과 복원력, 자기 치유력을 가지게끔 창조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9) 하였다. 이는 노동이 건강한 삶의 조건이란 의미다. 정신적 피로 스트레스 현상을 극복하는 힘은 노동하는 삶에 있었다. 노동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우울증도 자살도 없다. 노동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성사다!

어머니와 가장은 가족의 먹거리를 손수 생산하는 농부이자 살림꾼이며, 의식주에 필요한 도구들의 제작자이자 가족의 수호자이고 자녀의 교사이자 환란긍휼에 상부상조하는 이웃이었다. 직업과 관계없는 노동이 인간의 삶을 총합하고 빛나게 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힘을 쓰는 노동은 하지 않는다. 투자와 머리로서 꾀를 부리며 살려고 하므로,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려 할 뿐 섬김이 없는 것이다.

도시 산업화 사회의 전문화와 분업화는 한 가지 일만 하는 사람으로 규정해서 노동의 본질을 왜곡시켰다. 부엌의 싱크대가 고장 났다고 해도 내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전문인에게 시킨다. 자신의 전문성을 상품적인 가치로 따지는 습관이 있다. 그런 전문 직업을 확보하려고 30년 가까이 등록금을 내고 공부만 한다. 문제는 그런 전문성이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누가 써주지 않거나 뺏어버리면 아무것도 못하는 장애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참 딱한 일이다.

결국 같은 환경조건에서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을 따지면, 학력이 낮은 사람, 전문성 없는 사람, 무엇이든 두려움 없이 노동할 수 있는 사람이 월등한 비교우위를 갖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현실이다.


한번 와서 보시오!

산위의 마을에서는 치유가 이루어진다. 땀 흘리는 노동의 생활이 치유의 확실한 근거다. 흙에 발을 딛고 땀 흘리는 노동에는 영성이 있다. 몸이 움직이는 노동에는 마음과 진정성이 있고 나눔과 인정이 살아난다. 하늘의 별빛과 땅의 꽃향기로 사랑의 마음이 피어난다.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미신을 깨뜨리고, 무소유의 삶으로 얻는 대자유와 평화로움 때문에 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강요가 없는 자율의 시대에 왜 돈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할까? 경쟁하고 부자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산상설교의 말씀이 실현되고, 참된 행복의 문이 열리고, 치유와 자유와 풍요의 삶이 전개된다. 그러므로 가난함을 자처하며 사는 우리 마을을 ‘와서 보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누군가 산위의 마을에 입촌한다면 필시 사람들은 루저들의 현실도피라 할 것이다. 필자 역시 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고 또 마을로 들어와 살면서 그런 말을 자주 들어왔다. 우리 공동체가 도피생활이라는 말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왔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 중에는 피부로 느끼기에도 ‘종말이 다가왔다!’는 확신이 있다. 그런 믿음에서 우리는 반문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왜 도피하지 않습니까? 살고 싶지 않은가요?”


도시를 떠나야 산다

도피란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절박한 자들만의 행위다. 새 삶을 추구하는 자의 행동이고 하느님의 섭리와 질서에 순명하는 삶이다. 그것이 창세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이고 대안의 삶이고 신앙 공동체다. 그래서 공동생활 마을을 ‘피난처(Shelter)’라고 부르지 않는가.

주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에도, 소돔성과 고모라의 유황불 세례 때에도 ‘살려거든 뒤돌아보지도 말고 죽자 살자 도망쳐라.’ 하셨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님께서는 “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죽음의 먹구름이 이미 편서풍을 타고 하늘을 덮고 있는데 사람들은 왜 하늘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도피할 생각이 없는 걸까? 그 불감증이 무섭다.

오늘의 인간은 이미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유전자가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 창조 자체를 후회하셨고(창세 6,5-7)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창세 6,7-9).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묵시 21,5-6).

그리스도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공동체이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다. 재창조의 삶, 원안(대안)의 삶과 교육으로 품종 개량이 시작되는 곳이다. 소비문화 마술의 악령을 추방하고, 금융자본을 폐기시키고, 노동과 생명의 굿판이 일어나는 세상을 건설해야 할 의무가 있다.

* 박기호 다미아노 - 신부.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소속으로 충북 단양에 있는 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 마을’에서 살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박기호 다미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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