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시대: 낙타, 사자, 어린아이가 되어라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039

[경향 돋보기 -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시대] 낙타, 사자, 어린아이가 되어라


나는 사실 정신과의사로서 사회 전체의 행복에 대한 정치 · 경제 · 문화 모두를 아우르는 전반적인 분석과 구체적인 대처법을 제시할 능력은 없다. 다만, 지난 몇 년간 ‘행복’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그와 함께 불었던 ‘힐링’ 열풍을 짚어보면서, 이런 변화의 시기에 과연 우리의 정신건강이 어떤 좌표에 있는지, 그리고 개인들은 과연 어떤 자세로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지는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지수가 너무 낮은 우리나라

최근 들어 한국인의 정신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병들어있다는 소식이 많이 들린다. OECD 국가 중 경이적으로 높은 자살률, 특히 노인과 청소년 정신건강은 위험수위라는 연구결과도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영국의 레가툼연구소에서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경제, 기회와 사업가능성, 지배구조, 교육, 건강, 안전과 치안, 개인적 자유, 사회적 자본 8개 항목 기준)를 보면, 우리나라의 순위는 2011년은 24위, 2012년에는 27위로 더 낮아졌다고 한다. 이는 지진과 쓰나미, 불황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일본, 또 경제가 불안한 스페인, 슬로베니아, 몰타, 포르투갈보다 훨씬 낮은 순위다. 우리만큼 경쟁이 심하다는 홍콩, 싱가포르, 대만은 18위에서 20위를 차지했다.

상위 10개국은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핀란드, 네덜란드, 스위스, 아일랜드이다. 이들 국가의 특징은 복지가 잘된 자유롭고 안전한 국가로, 학벌이나 집안 배경 등과 상관없이 개인이 노력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반대로 행복지수가 낮은 국가는 대부분 아프리카의 빈국들이다. 돈이나 권력과 행복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아동사망률이 높고, 질병과 기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젊어서 죽어가고, 전쟁으로 비참하게 죽어가야 하는 나라에 살면서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과거에 비해 훨씬 불행해졌나?

그러나 행복지수에 대해서 조금 다른 시선과 결과도 있다. 2005-2009년까지 범세계적으로 조사된 갤럽연구소의 행복지수 항목부터 보자.

정서적 건강 면에서는 미소,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는다는 느낌, 즐거움, 행복감, 걱정, 슬픔, 분노, 스트레스, 흥미 있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 우울감 등의 항목으로 행복을 판단한다. 신체건강 면에서는 지난 한 달 동안 아팠던 날, 질병에 따른 부담, 정상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건강 문제, 비만, 충분히 쉬었다는 느낌, 에너지 수준, 감기, 두통 등을 들고 있다.

건강한 행동으로는 담배, 식이, 채소나 과일 섭취, 운동 여부이고, 직장에서는 직업만족도,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 상사의 처우, 개방적이고 신뢰 가능한 환경을 꼽는다. 삶의 기본적 조건에 대한 접근성으로는 지역사회에 대한 만족도, 환경개선 가능성, 깨끗한 물, 의료환경, 운동할 수 있는 장소, 밤중에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지 여부, 음식과 거주공간, 의료를 받을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있는지, 치과의사나 의사, 의료보험 여부는 구비되어 있는지 등을 물어본다.

갤럽연구소의 조사가 정말로 국가별 행복도를 정확하게 진단하는지 이견도 있겠지만 순위를 소개해 본다. 한국이 56위, 대만이 70위, 태국이 79위, 일본, 싱가포르, 홍콩이 모두 81위,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이 94위, 인도가 115위, 중국이 125위,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고 있는 듯한 네팔도 130위라는 결과가 나왔다. 모든 사회적 기반이 우수하고, 삶의 질 자체가 우월한 북유럽 국가들의 행복지수는 당연히 높게 나왔다.

갤럽의 행복지수는 얼핏 보면 사람들의 행복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모든 여건이 좋지 않아 보이고 위험하기까지 한 중남미 국가들의 행복지수가 절대적으로 높게 나온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아시아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특히 낮다는 것은 아시아 특유의 정서와 조사에 응답하는 태도를 고려해 보게 한다.

행복하게 보이는 중남미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성공하고 잘살아보겠다는 욕심이 아시아 사람들만큼 강하지 않다. 돈이 생기면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데 쓰지, 자녀 교육 등 미래에 많이 투자하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쟁적인 아이나 어른들은 왕따 시키는 분위기도 있다.

반대로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관심이 많은 아시아 사람들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빠른 국가사회의 발전을 경험하면서 더욱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을 수도 있다. 또 좋은 감정을 웃음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기보다는 안으로 삭이고 있을 가능성도 있고, 조사에서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이 어딘지 어색하고 뻔뻔스럽게 느껴져 조금 나쁘게 대답했을 가능성도 있다.

서양이 만든 조사결과에 따라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불행하고, 또 과거에 비해 훨씬 불행해졌다고 단순화하기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아 보인다.


행복감이 증가하지 않는 이유

임상에서 만난 노인 세대들은, 지금의 잣대로 보자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했던 비참한 시절에도 지금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 당시엔 그야말로 생존 그 자체가 절체절명의 화두였기 때문에 행복이니, 치유니 하는 것들에 관심을 둘 만한 여유가 없었다. 또 비교할 만한 큰 부자들이 많지 않아서, 김일성이 약속했던 것처럼 이밥에 소고기국 먹는 정도의 소박한 욕망만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사회가 잘살게 되어도 국민들의 행복감이 비례해서 증가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주관적인 행복에 대한 기대치가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극의 피로 현상이다. 일단 단것을 먹게 되면, 좀 더 단것을 먹어야 그 음식이 달다고 생각하고 덜 단 것을 먹으면 단맛이 없다고 착각한다. 또, 매스컴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소문 등을 통해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불필요한 정보를 너무 많이 접하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된 것도 사실이다.

지난 대선 때 복지와 경제민주화 등을 여야 상관없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은 그만큼 부의 편중에 따른 위화감과 불행감이 심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수년간, 재산이 많을수록 세금은 덜 내고, 재산이 적을수록 세금은 더 내게 된 사실, 사교육의 심화로 명문대 재학생의 절반 정도가 소득 상위 20%라는 자료(경향신문, 2013년 1월 25일, 김기범)등만 보아도 빈부격차가 더 심화되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비교하기 좋아하고 남 의식하는 한국인들의 상대적 불행감은 당연히 더 깊어졌을 것이다.

심리학자 에드 디너는 2010년 한국심리학회에서 발표한 “한국에서의 불행”이란 논문에서, 삶의 만족도가 한국이 5.3으로 덴마크, 미국, 일본에 비해 낮고, 존중받으면서 산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의 비율이 심지어 짐바브웨(72%)보다도 훨씬 낮은 56%였다고 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고 말하는 비율도 한국이 78%로 짐바브웨(82%)보다 낮았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 역시, 덴마크는 대다수 국민이 만족한다는 반면, 한국은 4명 가운데 한 명은 불만스럽다고 대답했다. 사회적 부패지수 또한 높았다고 한다(중앙선데이, 2013년 1월 27일, 이인식). 이 조사 결과는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신감, 또 사회에 대한 믿음의 전반적인 상실로 압축할 수 있겠다.


행복을 파는 어설픈 의학과 심리학 정보

그 때문인지 지난 몇 년 동안, 출판계, 방송, 공연시장 등등 문화계 전반은, 상처, 아픔, 소외감 등등의 코드를 전면에 내세웠다. 1950년대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60년대의 “잘살아보세!” 구호 이후 ‘집단성’과 ‘성장’을 강조했던 문화가 ‘개인성’과 ‘행복’의 추구로 확실하게 그 목표를 바꾼 셈이다. 이 와중에 다양한 심리학적 지식이 유포되면서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라는 명제를 진실처럼 받들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그날까지 행복을 추구하라는, 또는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는 절대명제를 그 누구에게도 받은 적이 없다. 지구상의 살아있는 것들이 모두 행복이나 불행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도 태어났기 때문에 그저 사는 것이다. 엄밀한 리얼리즘의 시각으로 보자면, 인간은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훨씬 더 많게 태어난 존재다.

그러나 ‘자아’와 ‘개인의 의지와 행복’ 그리고 ‘소유하고 소비하는 삶’을 강조하다 보니, 어느 틈엔가 사회 전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나만은 꼭 많이 누리고, 늘 행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화가 난다.”라는 소아적인 논리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행복을 파는 어설픈 의학과 심리학에 대한 정보는 사람들을 오히려 무기력하고 병들게 하기도 한다. 많이 갖지 않으면 ‘박탈’과 ‘열등’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는 사회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을 보는 물신숭배적 태도도 우리를 병들게 만든다.

그 와중에 잘못된 의학과 심리학적 지식도 한몫을 하였다. 우선 그 첫째가 유전자에 따른 결정론이다. 유방암 유전자를 갖고 있다며 마흔도 되기 전에 유방제거 수술을 받고, 형제가 정신분열증이니 나도 언젠가는 정신분열증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다. 유전자라는 주인이 ‘나’라는 기계를 조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상황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태도다. 부모가 과잉보호해서, 무관심해서, 폭력적이어서, 무능력해서… 그래서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일생 부모만 원망하고 산다.

셋째, 자기와 자녀가 받은 교육을 원망하는 태도다. 학교가 폭력적이어서, 계층 간에 기회가 불공평하게 주어져서, 주입식이어서, 획일적이어서 등등 나와 내 자녀의 모든 실패는 학교 교육정책의 잘못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넷째, 사회가 든 병에 모든 잘못을 돌리고 자신은 책임지지 않는 무기력을 보이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서, 상업성의 홍수라서, 잔인한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나는 잘못된 사회의 희생자라 결혼도, 육아도, 취직도 모두 포기하고 아프고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낙타, 사자, 어린아이가 되어라

물론, 그런 원인론들이 아주 무의미하고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사회의 책임은 짚지 않고 개인의 정신 건강에 무한책임을 돌려 기업들의 은밀한 지지를 받고 있는 긍정심리학이 위험한 것처럼, 자아의 책임과 의지는 부정하고 모든 것을 환경 탓만 하는 태도 역시 건강하지 않다. 내 책임은 부정하고 외부에서만 불행의 원인을 찾을 때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아프거나, 미치게’ 된다.

그러나 외부적인 원인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모순과 부조리와 악함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도전해 보고’, ‘싸워 이기면’, 현재의 아프고 미치겠는 ‘나’를 새롭고 건강한 ‘나’로 바꾸고, 사회 역시 바꾸려고 노력하면,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심성은 훨씬 더 성숙해지고 건강해진다.

그러나 그 작업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No pain, no gain.” 곧 “아프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표현처럼, 성가시고 불쾌하지만 자신의 콤플렉스를 보는 진지한 내적인 작업이 없다면 성장도 내적 발전도 없을 것이다.

부모, 학교, 사회가 바뀌면 나도 물론 영향을 받지만, 내가 바뀌지 않으면 부모도, 학교도, 사회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게르만족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지만, 20세기 히틀러가 지배한 독일은 나치제국이 되었고, 융의 콤플렉스 이론이 유행가처럼 번졌던 스위스는 평화로운 중립국가가 되어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국사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빛의 속도로 발전했고, 앞으로도 엄청난 잠재력을 더 많이 발휘하게 될 것이다. 많은 미래학자들이 한국은 이제 곧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가 될 것이라고도 예측한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아프고, 힘들고,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프지만 참고, 힘들지만 자신과 사회를 위해 조용히 노력하는 이들도 있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은 낙타가 되어야 하고, 그다음엔 사자가 되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낙타는 ‘인내’, 사자는 ‘자기 확신과 건강한 욕망’, 어린아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우리 마음속에 그 세 가지를 모두 품고 산다면,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자신의 고통 속에 내포된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치와 의미는 현실의 작은 ‘나(ego)’가 아닌, 초월적 존재를 지향하는 큰 ‘자기(Self)’를 찾아가는 비밀스러운 열쇠일 수 있다. 어쩌면 니체도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 됨을 지향하는 이들만이 회복과 치유를 희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 이나미 리드비나 -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서울대학교 외래교수, 한국융연구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96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