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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시대: 힐링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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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038

[경향 돋보기 -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시대] 힐링이 필요해!


지난해 대선이 끝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멘붕’이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알다시피 ‘멘붕’은 ‘멘탈(mental) 붕괴’의 줄임말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기신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인 상태를 일컫는다.

필자의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는 누가 대통령이 됐느냐 때문에 ‘멘붕’에 이를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다. 대선은 기껏해야 대선이고 삶이 삶인 것이다.

대선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멘붕’에 빠졌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실제 ‘멘붕’인지, ‘멘붕’이란 유행어가 ‘멘붕’을 야기하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그다음 이야기는 “힐링이 필요해!”이기 십상이다.

‘멘붕’이 많으니 ‘힐링’이 많아지는 게 합리적이긴 하다. 역으로 ‘힐링’의 번창을 ‘멘붕’의 증좌로 봐야 하는 것일까? 어쨌든 ‘힐링이 필요해.’란 제목의 노래가 있고, 힐링인터넷방송국이 있고, 힐링푸드에 힐링 여행상품까지 출현했으니 대한민국은 ‘힐링 공화국’으로도 설명될 수 있겠다. 물론 ‘힐링이 필요한 공화국’이란 사실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겠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상처는 찾아내지 않으면 치유할 수 없다.”고 말했다. 힐링의 우리말인 치유(治癒)를 위해서는 종국에는 상처를 찾아내야 하는데, 힐링이 진정한 ‘치유’인지는 논외로 하고 필자는 힐링에 대한 막대한 수요 자체가 우리 사회가 입은 상처들을 광고하는 듯하여 마음이 답답하다.


많은 힐링은 많은 문제

서양화가 황주리 씨의 수필에, “어릴 때는 사방에 개똥이 많았다.”는 대목이 있다. 부산 해운대에서 예쁘게 차려입었다가 개똥을 밟아 낭패를 당한 소녀시절 경험을 재미있게 전한다. 내 기억에도 길거리를 배회하는 개들과 그들의 배설물을 과거에는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의 숫자는 오히려 늘었지만 요즘 웬만한 도시의 거리에서 과거처럼 개똥을 구경하기는 힘들다.

필자가 어릴 때 우리 동네 개들은 대체로 집 안과 밖을 자유롭게 활보하였다. 골목길에 산재한 개 배설물 가운데 어느 것이 어느 집 개의 것인지 식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깨진 창(broken window)’ 현상에서 설명하듯 골목길은 상호 방치와 방치의 상승작용을 부르게 된다. 하나의 창문이 깨진 걸 방치하면 곧 그 건물 주변이 더러워지고 추가적으로 창문들이 깨지고 범죄자들이 꼬이듯이 말이다.

책임소재가 분명한 집 안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마당의 개 배설물은 물론 마실 온 다른 개의 것까지 즉각 치워진다. 대문을 경계로 판이하게 대처가 달라지는 이 같은 현상을 두고 시민의식의 문제니, 또는 도시행정의 문제니, 조금 더 나아가 ‘공유지의 비극’이니 하는 다양한 분석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지만 필자는 ‘힐링’과 관련하여서는 하나의 비유를 동원하고자 한다.

필자도 어렸을 때 단독주택에 살며 개를 키웠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 개를 키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유난히 깔끔하셔서 실내는 물론이고 조금 과장해서 마당까지 안방 수준으로 관리하는 어머니에게 골목길은 요즘 말로 ‘멘붕’이 아닐 수 없었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서울 어느 달동네의 철거 예정지를 둘러볼 일이 있었는데 그곳의 골목 모습에서 필자가 느낀 정도의 느낌을 그 시절 필자의 어머니가 받았을까?

달동네는 철거로 문제가 해결될 터이지만, 어릴 적 골목길의 문제는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해법이 있었다. 집집마다 개를 단속하고, 자기 집 앞 골목길은 집주인이 책임지면 골목의 ‘멘붕’은 척결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같은 문제 유형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은커녕 일반상식 수준의 해법도 도출되지 않는다.

구조가 다르기는 하지만 비합리성이 합리성을 대체한다는 측면에서 ‘딜레마 게임’을 닮았다. ‘비합리성의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딜레마 게임’을 무력화하는 방법은 각자가 속한 칸막이를 넘어선 소통이다. 골목길의 해법 또한 마찬가지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고 해결책을 찾고 해결책이 지속적으로 집행되도록 서로 강제하면 된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예에서 보듯 계란을 세우는 방법은 발상만 바꾸면 아주 간단하지만, 발상을 바꾸는 게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개똥 차원이 아니라 세상에 만연한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해 참아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는 그야말로 무력한 상황일 때, 계란을 세워야 하지만 가진 계란이라곤 그것 하나밖에 없어 깨서 세울 수도 안 깨서 안 세울 수도 없을 때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남겨질까?

그래서 우리에겐 ‘힐링’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올해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어릴 적 그 골목으로 돌아가면, 어머니에게 함박눈이 풍성하게 내린 어느 겨울날이야말로 ‘힐링’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세상을 덮어버려 순백의 세상으로 만드는 눈은 골목길을 어머니가 원하는 곳으로 바꾸어놓았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힐링’이 강설과 동일한 것이라면 눈 밑 세상의 근본적 변화 없이 잠시의 덮음으로 위안을 얻는 일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아마도 현실적으로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대놓고 무의미하다고 단정하지는 말자. 유난히 깔끔했던 필자의 어머니에게 골목길에 내린 눈이 주는 ‘힐링’은, 골목길의 상시적 ‘멘붕’이 아니었어도 진즉에 팍팍해진 삶을 견디는 데 힘을 주었을 수도 있으니까. ‘힐링’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잠시 숨 쉴 틈을 줄 수는 있다.


‘힐링이 필요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색깔이 180도 달라지지만 필자는 영화 ‘자이언트’에서 제임스 딘이 석유를 파 올리던 장면에서 ‘힐링’ 비슷한 것을 목격한다.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검은 석유를 뒤집어쓴 제임스 딘의 모습은 사실 ‘힐링’이라기보다는 카타르시스에 가깝다.

영화에서는 ‘힐링’도 카타르시스도 아닌 정확하게는 반전에 불과하기에, 추운 겨울날 이른 아침에 필자의 어머니가 골목길에 희멀겋게 내려앉은 눈을 어슴푸레 내다보는 행위로 체험하는 ‘힐링’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반전이 가능한 세상에서는 비록 순간일망정 충실한 ‘힐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줄거리뿐 아니라 ‘자이언트’란 영화 자체가 반전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제임스 딘은 영화 개봉을 2주 앞두고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죽음은 또 다른 반전을 일으켜 제임스 딘을 전설로 만들었다.

내친 김에 마저 석유 이야기를 하자면, 제임스 딘의 나라 미국은 석유의 나라이다. 영화 ‘자이언트’에 석유라는 모티브가 등장한 게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근대 석유산업이 태동했다.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이 미국 펜실베이니아 북서쪽 타이터스빌의 작은 벌목장 근처에서 1859년에 유정을 찾아내면서부터다. 이곳이 ‘오일 리전(Oil Region)’으로 알려진 석유산업의 발상지다. 석유 산지는 19세기 후반이면 러시아 제국의 카스피해 주변, 코카서스의 바쿠 주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등으로 확대된다.

산업혁명이 석탄에 기반해 영국에서 촉발됐다면 그 성숙은 석유에 기반해 미국에서 이루어진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렇게 영국과 미국에서 기초가 다져진다. 석유산업이 첫선을 보일 때 지금의 석유문명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첫 40년 동안 석유산업의 1차 시장은 조명시장이었다. 등불에 사용하는 고래기름이나 다른 기름을 대체하는 용도였다.

그러나 전기의 발명으로 조명시장이 급격하게 재편되면서 조명 쪽의 석유 수요가 갑작스럽게 소멸하였다. 마침 자동차의 대중화를 계기로 자동차 연료시장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지금의 석유문명은 번성할 결정적 기회를 잡는다. 이어 트럭, 비행기 등이 대규모로 동원된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석유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석유문명이 본격화하면서 인류는 우리 문명에 언제까지 석유가 공급될 수 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석유 공급에 관한 비관론을 대변하는 용어인 ‘허버트 피크’는 이 같은 관심의 산출물이다. 1956년에 미국의 지리학자 킹 허버트는 1970년쯤 미국의 석유 생산이 정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때 정점에 도달한다는 얘기는 그 이후로 석유 생산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허버트 피크’ 도달은 지연되고 있다. 우려와 달리 비교적 안정적으로 또 비교적 감당할 수 있는 가격으로 석유가 꾸준히 생산돼 공급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최근 호주에서 대규모의 석유가 발견되면서 ‘허버트 피크’ 도달 시점은 또 미뤄지게 되었다. 낙관론을 따르면 호주 석유를 제외하고도 현재 적어도 5조 배럴의 석유자원이 남아있다. 그동안 세계 전역에서 생산된 석유의 양 1조 배럴과 견주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석유문명은 존속할 전망이다.

이처럼 ‘허버트 피크’의 도달 시점이 예상과 달리 자꾸 늦춰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장의 힘과 기술혁신 때문이다. 심해석유, 샌드오일, 셰일오일 등 과거 상업성이 없던 것으로 간주된 석유자원이 시장상황의 개선으로 새롭게 가용자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그 무섭다는 이윤동기가 작동해서이다. 단순 무식하게 땅을 파서 석유를 찾아낸 ‘자이언트’의 제임스 딘과 달리 요즘 석유산업은 온갖 첨단 기술을 다 동원한다. 이윤동기에 기술력이 더해지면서 상업성의 경계가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석유자원을 찾아내 가용자원으로 만들어내고 있기에, 그렇기에 인류 문명은 한시름 놓아도 좋을까?

필자는 ‘허버트 피크’와 관련한 일견 고무적인 소식에 오히려 걱정이 심해진다. 석유가 무엇인가. 오랜 옛날 지구상에 존재한 여러 형태의 동물들이 땅에 묻혀 지구의 힘으로 변형된 것이다. 땅속에서 석유를 끄집어내는 행위가 필자에겐 고대 여러 동물들의 원혼을 불러내는 최후의 피로연처럼 느껴진다.


‘힐링’이 절실한 이유, 양극화

석유문명은 그 선배인 석탄문명과 함께 과거 시대의 동식물의 사체를 현대로 불러내 풀어놓았다. 뭐라고 할까, 그러한 연금술 또는 주술은 인류문명을 과거에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시켰다. 분명 현대인류는 화석연료의 도움으로 풍족한 삶을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지구온난화이다. 고대의 동식물을 환생시킨 인간의 탐욕은 주지하다시피 지구의 온도를 빠른 속도로 높여 인류문명과 우리 행성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대기를 채우고 있는 이산화탄소가 필자에겐 고대 생명의 원혼처럼 느껴진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지구온난화 또한 필자의 유년 시절 골목길에 산재한 개똥들처럼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반복하면 이론상으로는 해법이 존재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 해법이 도출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가 골목길의 개똥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사악한 이유는, 당시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개를 키워서 골목의 위기에 공동의 책임을 갖고 있었지만, 지구온난화에 관한 한 이익은 극소수에 돌아가고 책임은 전체에 전가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석유문명은 자본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기업들과 선진국들에게 부와 풍요를 주었고, 부와 풍요의 분배에서 소외된 인류의 대다수는 지구온난화란 모습으로 고대 생물의 원혼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세계 차원에서 진행된 석유문명의 명과 암은 일국 차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관철되고 있다. 대충 우리 사회만 놓고 보아도, 단적으로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문제로 드러난 극심한 양극화는 사회 전반의 양극화로 펼쳐진 경제발전의 짙은 그늘이다. 양당체제로 공고화한 정치체제는 기득권의 이익을 수호하느라 정신이 없고, 국가 또한 ‘가진 자의 국가’로 전락하였다. 재벌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마치 광야의 금송아지처럼 우리 사회에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기득권의 독점력은 너무나 강력하여서 국민 대다수를 효과적으로 배제하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 사회도 석유문명의 혜택을 누리지만 그 혜택은 사회 내에서 심각한 수준의 비대칭으로 나누어진다. 미국에서도 그러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더 이상 영화 ‘자이언트’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반전은 없다. 골목길 비유를 다시 들자면 이제는 개똥이 지천인 어떤 골목길과 주민들이 치우지 않지만 늘 깨끗한 상태가 유지되는 다른 골목길이 있으며, 그 두 골목길 사이에는 교류가 없고 소통이 없으며 상태가 서로 바뀔 일은 더더욱 없다. 반전 대신 비대칭과 분리가 영속화하는 시스템이 뿌리를 내린 지 이미 오래인 것이다.

그러니 가진 자를 위해서나 못 가진 자를 위해서나 ‘힐링’이 절실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오늘 아침에도 눈이 내렸다. 한남대교를 건너 남산길로 차를 몰아가는 동안 누구나에게나 있기 마련인 세상사의 소소한 시름을 잊고 눈 덮인 남산이 주는 아름다운 풍경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뒤차의 경적소리에 놀라 서둘러 시선을 눈 녹은 검은 아스팔트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힐링’이었다.

* 안치용 -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이며,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소장,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대표이다. 지은 책으로 「바보야 문제는 권력집단이야」, 「아프니까 어쩌라고」, 「청춘은 연대한다」(공저)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안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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