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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천주교와 개신교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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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2 ㅣ No.370

한국교회사 열두 장면 - 천주교와 개신교의 만남

 

 

그리스도교를 한자 문화권에서는 기독교(基督敎)라고 표기했다.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언제나 서글프고 아쉬운 일이지만, 2천여 년에 걸친 역사과정에서 그리스도교 곧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正敎會)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개신교(改新敎)로 나뉘어졌다. 여기에서 기독교라는 개념 안에는 원래 이세  교회가 함께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가톨릭교는 스스로를 ‘천주교’라 불러왔고, 그리스도교 곧 ‘기독교’라 할 때에는 개신교만을 뜻하는 용어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관행은 잘못된 인식의 결과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 두 교회가 그리스도교 곧 ‘기독교’란 이름을 공유하지 못했던 결과로 각기 다른 종교인 듯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서로 대립하고 다투기도 했던 데에는 이러한 이름 탓도 있을 법하다.

 

 

개신교에 대한 초기의 인식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접하게 된 계기는 17세기 한문 서학서(西學書)의 전래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문으로 쓰여진 서학서에서는 개신교에 관한 지식이 제대로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유럽의 지리를 소개해 주었던 알레니(Aleni, 1582-1649년) 신부의 “직방외기”(職方外紀)에서는 유럽인들이 모두 ‘천주정교(天主正敎)’를 믿는다고 막연히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주정교’는 그리스도교 일반을 뜻하는 단어로 생각된다. 천주교 선교사였던 알레니는 그리스도교의 분열상을 중국인들에게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 서양인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 우리 나라 신도들은 개신교의 존재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조선에 나와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지에 개신교가 전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래의 경쟁자에 대한 경계를 일찍부터 시도하면서, 우리 나라에 개신교가 전래되기 40여 년 전인 1840년대부터 신도들에게 개신교에 대한 경계의 말을 하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미래와 개신교와의 경쟁에 대해서는 푸르티에(Pourtie, 申妖案, 1830-1866년) 신부도 염려한 바가 있었다. 그는 1865년 11월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인 신도들과 선교사들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도 신앙의 선포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서술했다. 그러나 조선에 신앙의 자유가 와서 선교사들이 거추장스런 상복을 벗어던질 때에는 재력을 앞세운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몰려와 저 착한 예비신자들 가운데 상당수를 먼저 속아가리라 예견했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반대되는 행동을 자행하는 장사꾼이나 협잡꾼 서양인들을 보고 성교회(聖敎會)를 향한 열정이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푸르티에 신부가 대원군의 박해 때 순교한 뒤 10여 년이 지나서 조선은 문호를 개방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해시대를 겪었던 천주교 선교사들은 개신교가 자신들의 수고와 희생의 결과에 무임승차하여 불로소득을 얻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개신교에 대해 강한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개항기 천주교와 개신교

 

신앙의 자유는 1890년대 중엽에 이르러 공인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예견했던 바와 같이 개신교 선교도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갔다. 이 마당에서 천주교 조선교구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년) 주교는 “예수진교사패”를 간행했다. 이 책에서는 개신교를 ‘열교(裂敎)’ 곧 천주교로부터 분열되어 나간 교파로 규정하고 천주교의 정통성을 밝혀주고자 했다. 곧 천주교는 개신교와는 달리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네 가지 특성이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갈등은 개항기를 넘어서 식민지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문서를 통해서 개신교보다 천주교가 우월함을 밝히려는 노력은 대구교구에서도 진행되었다. 곧 1936년 대구교구에서는 “천주교인과 예수교인”이란 소책자를 간행했다. 이 책에서는 천주교회만이 참다운 교회이며, 진정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좀더 적극적 입장에서 개신교도들에게 천주교로 개종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는 1890년대였다. 이때부터 1900년까지 10년 동안 개신교는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나갔다. 그리고 그 격차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예를 들면, 1897년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개신교도들은 6,800여명이었다. 그러나 1900년에는 그 숫자가 13,569명에 이르렀고, 1905년에는 37,407명이었다. 그리고 1907년에 이르러서는 개신교 신도수가 72,968명에 이르러, 당시 63,340명으로 집계된 천주교 신도수를 능가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천주교인들의 숫자가 1907년 이래 단 한 번도 개신교도를 능가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개항기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식적 만남이 처음으로 시작된 때는 1889년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들자, 개신교 선교사들이 구호금을 걷어 기민(饑民)구제에 사용해 달라고 천주교 선교사에게 전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협조적 자세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얼마 안 가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립은 점차 치열해졌고 그 상호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개신교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부 지역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서로 충돌했다. 예를 들면, 1890년대 명동 성당을 건축하던 과정에서 건축 광경을 구경하러 온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구타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895년 평양에서는 성당의 대지 문제로 자그마한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1901년에는 황해도 지역에서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의 심각한 충돌이 발생하였다. 해서교안(海西敎案)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정부의 중재로 마무리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매우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남은 말

 

한국에서 개항기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천주교도가 되거나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교리를 상호 비교하여 면밀히 검토한 다음 자신의 종교를 ‘선택’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서 먼저 선교를 받았는지에 따라 자신의 종교가 정해졌다.

 

그러나 일단 자신의 종교를 결정한 다음에는 서양교회의 대리전이 이땅에서도 이어졌다. 이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일이었으며, 자기 소모적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의 교회는 민족과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의 진정한 방주가 되지 못했다. 천주교나 개신교는 모두가 하나의 기독교이며, 그 신도들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이땅의 겨레들은 기독인들이 한마음을 같기를 바라고 있음에 틀림없다.

 

[경향잡지, 2002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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