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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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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90

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

 

 

사도시대를 시대적으로 한계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사도들이 모두 사망한 때까지로 본다. 따라서 사도시대의 종말은 계시시대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시대는 ‘계시의 사도시대’라 일컬어진다.

 

사도시대에는 두 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엄격한 유다교 사상에 젖어 생활하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개종한 그리스인, 헬레니스트, 비유다인으로 구성된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다.

 

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전해주는 사도행전은 주로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가 유다계 공동체를 소홀히 취급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상대로 사도행전을 썼기 때문이다. 오늘날 비성서적 문헌들의 새로운 발견과 사용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70년까지 초창기 교회 안에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립

 

(1) 유다계 그리스도교

 

사도시대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도행전에 서술된 예루살렘 교회뿐만 아니라 유다 지방을 제외한 팔레스티나 본토와 요르단강 서안지역에도 있었다. 예루살렘 밖의 유다계 공동체로는 사마리아 교회, 갈릴래아 교회 등이 있다.

 

①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사도들은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힘과 권한을 받았다. 사도행전에 전해지는 베드로의 설교(2,14-36; 3,11-26; 4,8-12)에서는 초창기 교회의 복음선포의 계획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복음선포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진술과 하느님이 하신 일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유다인들에게는 구약의 메시아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했다. 그래서 유다인들의 회개와 귀화를 촉구하는 호교적인 내용도 많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외에도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예수의 생애, 즉 세례부터 승천까지의 예수의 일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들은 사도들의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특히 산상설교(마태 5-7장)의 내용은 중요한 복음선포의 주제가 되었다.

 

이러한 복음선포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업적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직접 목격자인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신도들로 구성되었다.

 

② 사마리아 교회

 

사마리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도행전에 언급되어 있다(8,4-25). 이 교회는 스테파노의 순교 후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헬레니스트들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특히 사마리아 출신인 필립보 부제가 자기 고향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필립보의 설교와 기적을 보고 개종하였다.

 

그런데 사마리아에는 마술로써 사람들을 매혹한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필립보에게 세례를 받은 후 필립보의 기적을 보고 놀랐다. 한편 사마리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립되자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와서 세례받은 신자들을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였다. 이 때 시몬은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자신도 성령을 베푸는 권한을 달라고 청하였다가 크게 힐책당했다.

 

이 시몬사건은 사마리아 교회가 선교에 있어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고, 따라서 사도행전은 더 이상 자세하게 사마리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교회는 시몬사건 후에도 계속 존재하였으며, 49년 바울로 사도는 이 공동체를 방문하였다(사도 15,3).

 

③ 갈릴래아 교회

 

교회 초창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갈릴래아 지방에 전파되어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세 가지 사실로 추리되고 있다.

 

1. 복음성서에 유다 지방에서 전승된 요소와 갈릴래아 지방에서 전승된 요소가 명백하게 구분되어 나타나고 있다.

 

2. 고대 유다계 그리스도교 비문(碑文)이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에서 발견되었으며 몇명의 사도들은 갈릴래아 지방과 가족적 연대를 가지고 있었다.

 

3.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시몬은 가나 출신의 열성당원으로 갈릴래아에서 로마제국에 항거하기 위해 기원전에 일어난 광신적 유다주의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고,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열성당원이라고 불렀다(사도 5,37참조). 이는 갈릴래아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며, 열성당원인 이 신도들은 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갈릴래아 농민과 어민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70년 예루살렘 멸망후 광신적 유다주의운동은 소멸되었고, 더욱이 바울로 사도의 선언으로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세속적 민족주의로 흐르는 유다주의와 결별을 고하면서 이 운동을 이단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신약성서에는 더 이상 갈릴래아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2) 이방계 그리스도교

 

① 안티오키아 교회

 

시리아는 사도시대에 그리스도교가 크게 발전한 지역으로, 특히 이방계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중대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안티오키아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주민은 주로 시리아인들이었고 그리스인들과 유다인들도 있었다.

 

이 도시의 복음화는 다마스커스에서와 같이 37년에 예루살렘에서 나온 헬레니스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후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방계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공동체로 등장하여 40년에 예루살렘의 사도단은 바르나바를 이곳에 파견하였다(사도 11,22).

 

안티오키아 교회는 크게 발전하여 글라우디오(Glaudius, 41-54) 황제 시대에 처음으로 그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다(사도 11,26).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제는 더 이상 유다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독립된 큰 단체로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 교회에서는 지방교회의 장로 부제와 독립된 지위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또는 교사라고 불리는 선교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사도 13,1).

 

그리고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완전히 분리된 두 공동체, 즉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병존하기 시작하였다. 갈라디아서(2,11-14)에 의하면,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그들의 관습 즉 개종한 이방인들과의 식사금지법을 엄수하였다. 그런데 성찬례는 식사중에 거행되었기 때문에 두 공동체의 신도들이 이 예식에 함께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는 후에 내분의 이유가 되었다.

 

② 로마 교회

 

로마 제국의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로마에서 유다교인들과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도들간에 충돌이 일어나 글라우디오 황제가 50년에 유다인들을 축출하였다. 이 때 바울로는 축출된 신도들 중에서 아퀼라(Aquila)와 브리스킬라(Priscila) 부부를 51년 고린토에서 만나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었다(사도 18,2). 또 그가 57-58년 겨울에 로마 신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 로마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미 크게 성장해 있었다(로마 1,8).

 

로마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전설과 전승된 증언들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고 보고 있다. 성서문헌은 43년부터 49년 사이의 베드로의 활동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 260-340)에 의하면 44년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25년간 머물렀다고 전한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43-49년에 베드로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전한다.

 

베드로는 로마 주교들의 모든 명단에서 첫자리에 놓여 있는 로마 교회의 창설사도로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로마 주교명단은 역사 및 연대기적 관심보다는 교리적인 목적에서 언급되었다. 즉 로마 주교명단의 순서는 신앙의 순수성과 교리의 견고성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기에 초기 로마 주교들의 재위기간이 기입되지 않은 것은 당연하며, 로마 주교명단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후기(4세기 초)에 생긴 것으로, 에우세비우스가 처음으로 로마 주교들의 재위기간을 기입하였다.

 

 

2)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

 

(1) 유다교 종파

 

첫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유다교 종파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다 백성의 종교생활(할례, 정결예식, 안식일 준수)과 종교행사에 여전히 참여했기 때문이다(사도 3,1; 5,21).

 

(2) 특수 공동체의 형성

 

그러나 예루살렘 신도들은 그들 특유의 공동체, 즉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의미하는 ‘Ecclesia’를 형성하는 동시에 예수를 주님(Kyrios)이라 부르며 그들의 고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른 유다교인들은 예수의 고향 이름을 따서 이들을 ‘나자렛파’(Nazaraeans)라고 불렀다.

 

이들은 안식일에 유다교의 공동기도에 참여한 다음, 개인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집회는 훈시부분과 예절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훈시부분에는 비신도들에 대한 예비자 교리교육(예수의 부활과 그의 메시아로서의 위치를 강조하는 설교;사도 2,23-36)과 신도들을 위한 강론으로 신앙과 애덕실천을 위한 권유(사도 14,22; 16,32) 및 윤리교육이 있었다.

 

예절부분에서는 성찬례, 즉 성체성사의 집전이 있었다(사도 2,42; 20,7). 그리고 성체성사를 거행한 후에 기도가 있었는데, 이는 원칙적으로 전례를 집전하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맡았다.

 

(3) 상부상조의 경제조직

 

예루살렘 공동체의 생활상 중에서 가장 특이한 모습은 상부상조의 경제조직이다. 신도들은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사도 4,32),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2,45)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4,35)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4,34).

 

그런데 재산의 공동소유는 의무사항은 아니었다(사도 5,3-5). 이런 점에서 사도시대의 경제조직은 집단주의나 공산주의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유재산 포기에 따른 재산공유는 강제성이 아닌 자발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 뿐 아니라 약속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던 종말론적 사상과 현세의 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감화되어 비롯된 것이다.

 

(4) 교계체제의 성립

 

한편 이러한 상부상조의 경제조직은 식량배급의 문제로 인해 교회 내부에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사도들은 헬레니스트들 중에서 일곱 명을 뽐아 기도와 안수를 통해 부제로 임명하여(사도 6,1-6), 헬레니스트들의 식량배급뿐 아니라 설교와 세례 예식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부제에 해당되는 직책은 히브리인들에게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장로(Presbyter) 또는 원로(Elder)로서 그들의 대표는 야고보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모교회는 성직계급의 질서를 갖춘 공동체였다. 복음선포, 교회관리, 영적 지도, 성사집행 등의 직무를 맡고 있던 ‘사도단’, 사도들의 보조단체로 히브리인 신도들을 돌보던 ‘장로단’과 헬레니스트 신도들을 책임진 ‘부제단’이 존재했다.

 

그러나 37년 스테파노의 순교와 헬레니스트에 대한 박해로 이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고 사도들도 예루살렘 밖에서 선교활동을 함에 따라 장로단이 예루살렘의 유일한 성직자단을 형성하였다.

 

(5) 유다교 색채의 교회

 

베드로 사도가 43년경 예루살렘을 떠난 후(사도 12,17)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자 이 교회는 더욱 유다주의가 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었다.

 

다른 문헌들에 의하면 야고보 주위에는 예수의 많은 친척들이 주도세력을 형성하여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62년 야고보의 순교 후, 예수의 사촌인 시몬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권을 이어받았으나 예루살렘 멸망으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 유다계 공동체는 그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상실하였다.

 

또한 야고보 순교 후 예루살렘에서 ‘반로마 메시아니즘’이 등장하는 등 과격한 유다인의 애국심 및 민족주의의 발생과 바울로 사도의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장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다교는 완전히 결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신학생 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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