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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복음전래사 실재 여부와 저술 이유, 그리고 소장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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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0

'조선복음전래사' 실재 여부와 저술 이유, 그리고 소장처는?


한국교회 창립 신유박해 등 생생한 증언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조선복음전래사'는 주어사 강학회를 시작으로 △ 한국 천주교 창립 △ 정약용의 유배 △ 서학 금지 △ 을사추조적발사건 △ 신해박해 △ 주문모 신부 입국 △ 신유박해에 이르는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다.

 

따라서 '조선복음전래사'는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관한 결정적 증언 자료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를 새롭게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과 천주교와의 관계도 확실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와 발굴 가능성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과연 존재했나

 

'조선복음전래사'는 다산 정약용(세례자 요한)이 1821-1822년 철두철미한 금욕과 은둔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묻힐 무덤에 들여놓을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준비하면서 함께 저술했다는 것이 교회측의 지배적 견해다. 반면, 유학자들은 '자찬묘지명'이 바로 조선복음전래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석우(한국교회사연구소장)신부는 “조선복음전래사가 분명 존재했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이유로 '조선복음전래사'를 기초해 다블뤼 주교가 저술한 '조선순교사 비망기'와 '자찬묘지명'을 대조할 때 그 내용이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지적했다.

 

예로 묘지명에는 주어사 강학회가 1779년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비망기는 이보다 2년 앞선 1777년에 시작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또 묘지명은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이 “서교로 몰려죽었다”고 부정적으로 적고 있으나 비망기에서 다블뤼 주교는 “정약용의 증언만으로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순교 사실을 입증할 만하다”며 묘지명과 달리 긍정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달레 신부 역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를 옮기면서 정약용을 “신유박해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그는 여러 종교적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 조선에 복음이 전래된 비망기를 남겨놓았는데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이야기한 대부분의 사실이 거기에 수집되어 있다”(달레 천주교회사 불어판 상권 p.121)고 고백했다.

 

최 신부는 “'조선복음전래사'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국내 일부 학계에서 교회측 자료가 올바로 평가되지 않은 채 경시되거나 또는 도외시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왜 저술했나

 

교회측 사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첫째로, 유배생활을 마감한 다산이 은둔 금욕생활을 시작하면서 과거에 대한 깊은 참회와 종교심이 우러나 저술했다는 설과, 둘째로, 회갑을 맞아 죽음을 준비하면서 묘지명에는 반대파로부터 비난받거나 공격받을 만한 것들을 남기지 않은 대신에 서학(천주교)을 위해 자신의 증언을 나름대로 고지식하게 전하기 위해 비본(秘本)을 저술했다는 주장이 있다.

 

최근에는 다산의 절친한 지기인 이기경이 공서파(攻西派)로 입장을 바꿔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물리치고 유학을 정학(正學)으로 옹호하기 위해 천주교인을 학살한 공서파의 잔악한 행위를 변호하기 위해 '벽위편'(闢衛編)을 저술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즉 다산이 자기 가문과 천주교, 신서파(信西派)의 입장을 변호하고 이기경의 '벽위편'에 대한 답변으로 저술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학자들은 '조선복음전래사'와 '벽위편'이 모두 신유년(1801)에 끝나고 있음을 들고 있다.

 

 

어디에 묻혀 있을까

 

▲ 박해 당시 유실설 : 다블뤼 주교가 소장했던 '조선복음전래사'(사본일 가능성 높음)는 안타깝게도 1863년 주교관 화재사건으로 인해 여러 보고서와 자료와 함께 소실됐다. 따라서 교회측 소장 사본은 남아있지 않다. 박해시 유실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다블뤼 주교 비망기와 달레 신부 천주교회사의 기록이다. "정약용은 그의 저서 중 여럿을 박해동안 땅 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그래서 좀이 먹고 썩어버렸다. 그러나 많은 것이 그의 가족들에 의해서 보존됐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불어판 상권 p121)

 

학자들도 지금까지 사본조차 전래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달레의 증언처럼 박해기간에 지하에서 유실됐기 때문이라고 가장 많이 말하고 있다.

 

▲ 다산 집안 소장설 : '조선복음전래사'는 가족들에게 비본으로 전해졌다. 또 다블뤼 주교는 '조선복음전래사'를 인용하면서 “그의 책은 그의 집에 숨겨져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오늘날에도 극소수를 제하고는 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도 그 원본이 정씨 집안의 비본으로 몰래 전해지고 있을 가능성을 추리할 수 있다.

 

또 "일생동안 550여권의 책을 썼다"는 다산의 증언을 미루어 볼 때 다산 문집인 '여유당전서'에 겨우 154권만이 수록돼 있어 정씨 집안을 좀더 세밀하게 조사할 경우 찾을 수도 있다고 학자들은 한 가닥 희망을 내비쳤다.

 

한국교회사연구소 한 연구원은 다산 문집이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에서 많이 발견됐던 만큼 외가쪽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 신서파 및 다블뤼 주교 측근 소장설 : '조선복음전래사'가 공서파 '벽위편'의 방어책으로 저술된 만큼 다산과 가까운 신서파 학자와 다블뤼 주교가 그 사본을 소장했듯 순교자 약전 자료 수집에 협력했던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일부 평신도들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설.

 

최석우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경우 다산의 누이에게 성사를 베푸는 등 가까웠고 다블뤼 주교의 일에 협력했기 때문에 '조선복음전래사'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조선복음전래사'를 추적하기 위해선 최양업 신부 사료 발굴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신부는 또 "다산은 이른바 천주교를 유교에 적응시킨 보유론을 주장한 마태오 리치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하면서 "조선복음전래사가 발견되면 모든 종교가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 만나고 공존하는 한국 천주교의 토착화 신학의 진면목을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비본의 발굴을 고대했다.

 

[평화신문, 2000년 9월 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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