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폭력과 희생: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5)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918

[경향 돋보기 - 폭력과 희생]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5)


우리 사회의 폭력

만연한 폭력 ·· 폭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긴 설명이 없어도, 우리는 폭력 현상에 익숙하고 그 가혹한 양상도 잘 알고 있다. 최근에 심각하게 불거진 학교폭력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겠다. 동급생이나 하급생을 자기 욕구의 희생양으로 삼아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 청소년들의 폭력 의식은 가슴 아픈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폭력적 성향이 가치관 형성 과정에 있는 청소년들의 사고와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몇몇 문제가 있는 청소년들의 개인적인 폭력행위로 한정할 수 없다는 점을 목도하게 된다.

사실 폭력적 행위는 개인적 특성인 것처럼 보이지만 발생근원은 사회적이므로 그 원인과 책임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이 함께 요구되어야 한다. 또한 정확한 통계가 부족하지만, 주변에 만연해 있는 가정폭력 역시 언급할 필요가 있는 예이다. 배우자 폭행, 부모 학대, 아동 학대와 같은 폭행은 가정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감추어진 채 자행되고 있다.

오늘날 가정이 폭력의 못자리가 되고, 학교는 폭력의 배움터가 되어가고 있으며, 사랑의 보금자리가 그 본질적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면화된 폭력 ··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은 우리 사회에 지속되고 만연한 폭력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전쟁이라는 극악한 폭력의 아픔과 전쟁 못지않은 가난의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으며, 현대사는 이 아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겨운 고난과 투쟁의 과정이었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폭력과 가난이라고 하는 사회 경제적 폭력에서 생존하려고 주변을 돌아볼 겨를 없이 오직 앞만 바라보고 질주해온 역사였다. 이 역사가 사회의 분노를 내면화하고 그로써 내면화된 분노가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우리 사회의 폭력이 일상화됐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역사 경험은 경제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합리화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공동체에서 분리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산업근대화의 경험은 능력이 없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에 대한 차별을 묵인하고, 권력에 대한 전 사회적인 욕망을 가동시키는 기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 약자에 대한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은폐시키기도 하였다. 이런 사회적 역사적 환경은 군사독재 같은 정치적 억압, 저학력자의 사회적 배제, 저소득층의 경제적 소외, 고질적인 성차별과 지역차별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을 형성해 왔다.

뿌리뽑힌 철거민, 용산참사 ·· 우리 사회가 경제적 빈곤에서 탈출하려고 어떤 과정을 밟아왔던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은 늘 경제발전의 희생제물이 되어왔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경제발전을 위해 저임금, 저곡가, 주택재개발 등이 주요 정책으로 정당화되어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은 무시되거나 훼손되기 일쑤였으며, 서민들의 눈물을 담보로 한 폭력성을 내재하였다.

40여 년간 지속되어 온 수도권 재개발정책은 외향적으로 화려한 성장만을 선전구호로 삼은 반면, 서민들의 삶의 자리는 기득권층의 개발 폭리를 위해 송두리째 뽑혀야 했다. 이런 차별의 연장선에서 국가가 자행한 무참한 폭력의 대표적 사례가 2009년 1월 20일 새벽에 발생한 용산참사다.

용산 제4구역 재개발 철거민은 자신의 재산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치안당국에 의해 오히려 범법자로 취급당하며 폭력적인 진압과정에서 참혹하게 화재로 죽음에 내몰렸던 것이다. 용산참사는 국가 주택정책과 개발정책이 실상 사회 경제적 약자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정책이었으며, 공공의 이익이 아닌 일부 개발업자의 이익만을 보장해 주는 개발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국가정책은 이미 도시빈민과 재개발지역 철거민, 그리고 영세세입자에게 잔혹한 국가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용산 희생자들이 자신의 죽음으로 고발하였다.

표류하는 민주주의, 제주 강정마을 ·· 아울러 제주에서 진행 중인 해군기지 건설사업 역시 부당한 국가폭력의 한 사례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2007년 5월 제주 해군기지 후보지 선정발표 이후 강정마을 주민들은 정당한 이의제기와 민주적 절차의 하자 등을 이유로 공사강행에 대한 항의와 공사강행 중단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지만, 관련 당국인 해군측은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며 공사를 강행하고 있어, 국책사업인 해군기지 건설현장에서의 갈등은 민주주의 위기 상황까지 치닫고 있다.

이는 국가가 국책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민주절차를 무시하고 해군기지 후보지 주민들의 의견을 묵살하며 강행하는 국가에 의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정하고 투명해야 할 국책사업은 개별기업의 사적인 공사가 되어버렸고, 민군관광복합미항 설계도면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국회 지적과 2012년 기지공사비 전액 삭감(신청 예산의 96% 삭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해군의 처사는 국민주권의 기치와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침해하는 폭력으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현재 제주 강정마을 주민 대다수는 원치 않는 해군기지 건설공사로 6년 가까이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안의 폭력 ·· 모든 인간은 저마다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 폭력적인 성향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자신이 결코 폭력행위의 가해자가 될 리가 없다고 여긴다. 우리가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과 무관하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그저 끔찍한 학교폭력이나 가정폭력의 희생자만 아니기를 바라며 폭력을 외면하며 지낸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함정이 있다. 사회 구성원은 그 사회의 폭력에 대해 일정부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애써 외면하거나 방관하더라도 책임은 줄지 않는다. 폭력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폭력의 방관은 사실상 폭력에 가담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화되어 우리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다. 우리는 구조적 폭력의 현실에 둔감해졌다. 설령 개인의 실존적 폭력 앞에서 아픔과 분노를 느끼지만, 구조적인 폭력과 거대한 규모의 폭력은 시야에 포착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사회 구성원 사이에 내면화된 폭력은 사회의 폭력 현상에 대해 문제를 외면하거나 합리화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폭력과 예수 그리스도

2000년 전 예수님이 겪은 구조적 폭력을 보자. 로마제국이 광활하게 영토를 석권하고 식민지를 지배하고, 지배계급층이 정치 · 사회 · 경제에 걸쳐 억압과 착취를 했다는 점에서 당시 국가폭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고 볼 수 있는데, 또한 그 가운데에서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폭력상황과 깊은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탄생과 유아살해 ··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복음서는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했다는 기사를 전해준다. 향후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자를 제거하겠다는 의도로 보이는 이 학살은 통치자들이 보여주는 폭력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마태 2,16).

예수님의 탄생은 권력자의 학살폭력의 원인이었고 표적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는 참혹한 학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비폭력의 가르침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폭력을 포기하라.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루카 6,29-30).

비폭력은 예수님 제자들의 주요한 지침이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순교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동태복수법을 율법으로 여기던 유다인들과 다른 윤리적 자세가 바로 비폭력이었다.

성전정화 ·· 그러나 비폭력 가르침은 수동적인 폭력의 피해자와 방관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벌어진 불의와 부패를 고발하고 저항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마르 11,15-16;마태 21,12-13; 루카 19,45-46; 요한 2,14-16).

사실 비폭력 원칙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성전정화 대목은 비폭력 입장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많은 논의가 있지만, 성전정화 사건이 예수님 공생활에 중요한 사건이었던 점과 성전의 잘못된 관행을 분명하게 개선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체포, 신문과 사형선고, 십자가 처형 ··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체포되어 유다 최고의회와 빌라도 총독에게 신문과 재판을 받으셨다(요한 18,19-24;18,28-31;마태 27,26 등). 유다 최고의회에서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국가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하였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 방식은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로마제국의 노예와 식민지 백성에게 부과되는 형벌이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시의 부당한 사법제도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당한 구조적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문과정이나 사형언도에 어떤 항의나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모든 부당한 수모와 체벌, 그리고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십자가 밑에서 최후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의 증언을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27,54).


폭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역할

비폭력 저항 ·· 만연해 있는 우리 사회의 폭력과 관련하여 신앙인의 역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비폭력을 수행하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을 대항적 폭력으로, 구조적인 악을 도구적인 악으로 대적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요 역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고민은 바로 ‘비폭력’에 있다. ‘비폭력’은 폭력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감수하라는 것이 아니다. ‘비폭력’은 폭력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비폭력’은 문제해결 방식을 폭력적인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자기통제요, 자기다짐인 것이다. ‘비폭력’의 의미를 침묵하며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나 또는 폭력의 방관자가 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폭력의 최대 희생자는 인간이다. 당연히 폭력의 첫 번째 희생자는 폭력 피해자이고 두 번째 희생자는 가해자이며, 세 번째 희생자는 사회구성원 모두이다. 폭력은 인간 존엄성을 거부하고 인간의 품위를 오직 힘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와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폭력’의 가장 핵심적인 이해는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 항거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존엄성의 감시자 ·· 급속도로 진전된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는 심각하게 손상받고 있으며, 20:80을 넘어 1:99라는 극단적 양극화와 재화에 의한 인간소외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지난 120년 동안 사회교리를 통해 현대 산업사회에서 추락하고 있는 인간 존엄성의 가치에 주목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그리고 공동선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왜냐하면 교회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하느님의 모상이며 피조물인 인간의 구원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기본적인 권리, 철회할 수 없는 인간 존엄성,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인간품위를 실현할 권리 등을 주장해 왔다. 그리고 인권 침해 현실과 존엄성 파괴를 감시하고 고발하며 항의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라고 선언해 왔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은 교회공동체에서 특별한 위치를 얻고 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단지 사회 경제적으로 약하다는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예수님 말씀에서 기인한다.

가난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웃 사랑의 계명에 대한 첫째 대상자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며, 인간 존엄성 실현은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현실을 통해 측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약하다는 이유로 편견에 시달리고 차별을 받는 모든 상황을 인간 존엄성 침해라는 구조적 폭력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역할은 모든 폭력의 거부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화된 사회 경제적 폭력, 국가폭력의 감시자요, 고발자이며 항거자여야 한다.

또한 폭력의 피해자 편에 동참해서 비폭력 불복종 저항으로 폭력의 종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요 태도이다. 이 같은 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미 선언되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6-37).

* 이강서 베드로 - 서울대교구 신부.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빈민사목위원회 제5대 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장위1동 선교본당 주임이다.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이강서 베드로]


97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