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강론자료

2012-0805...주일...사람이 해도 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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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2-08-04 ㅣ No.1280

연중 제 18 주일 (나해)

탈출기 16,2-4.12-15           에페 4,17.20-24          요한 6,24-30

2012. 8. 5. 등촌3.

주제 : 사람이 해도 되는 말

무척 더워졌습니다. 날씨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말로, 하늘이 따라서 움직일 일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이런 경험이 없었기에, 정말 하늘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푸념한다면, 우리의 소리를 듣고서 반응을 보여야 할 그 대상은 누구이겠습니까?

 

사람은 아주 많은 자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거나 선택하든지, 사람은 그만큼 누릴 수 권리를 지닌 존재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가진 자유는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이나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으며, 그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피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사람의 자유라고 한다면, 세상에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이리저리 몰아붙여도 잘못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그것이 사람이 가졌다는 자유의 본질일까요? 이런 소리에 한 가지 따라붙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런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붙는다는 반갑지 않은 소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지난주일, 연중17주일 복음말씀은 작은아이가 가졌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시작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은 기적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그 후속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장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먹을 것을 나누어먹었고, 그 다음부터는 배가 고픈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소식이 따라 붙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그렇게 편하게 일도 하지 않고 먹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기적만을 찾아 헤맨 사람들의 모습을 예수님이 보셨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드러낸 것도, 사람이 자기자유를 올바르게 드러낸 행동일까요?

 

먹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먹는 일과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적을 베푼 다음에, 다시 만난 그 사람들 앞에서 당신자신을 빵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들더러 예수님의 몸을 먹는 식인종이 되라는 얘기야.....하면서 질문할 수 있는 세상의 논리와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려운 얘기라고 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반드시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고, 우리들 맘에 들지 않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자유가 마음껏 드러나는 일에는 방해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는데 말입니다.

 

지금부터 2300년 전쯤에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탈출기의 말씀도 같은 내용입니다. ‘,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 힘겹고도 먹을 것 없는 광야로 나오지 말고, 그저 배불리 먹다가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바라는 일부 히브리민족 사람들의 생각이나 말은 얼마나 정상적인 얘기일까요? 그것을 판단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이런 태도가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기 시작한 다음에, 시간이 흐르고나서 하느님 제가 잘못 살았습니다. 그저 용서만 해주십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엇을 얼마나 올바른 길로 돌이켜 놓을 수 있는 행동이 되겠습니까?

 

애석하게도 사람이 자유롭게(?) 살았던 일의 결과가 치명적(致命的,=(치명상)=목숨이 위험할 만한 일)인 것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치명적이라는 것은 그래도 돌이키거나 상처를 치료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 삶을 바꾸기에 시간은 부족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자기 생각만하고 산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삶을 올바로 돌이키는 일은 얼마나 가능한지 그 가능성도 살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은 광야를 헤매던 히브리백성에게 메추라기 고기와 빵을 만들어먹을 수 있었던 만나40년 가까이 내려주셨습니다. 오늘 독서말씀 안에는 그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그렇게 먹을 음식을 내려주신 하느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불만을 제기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 또 한편 신기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갖거나 행사할 수 있는 자유는 얼마나 크고 다양하겠습니까? 아니 사람이 입을 열어, 어떤 말까지 하거나 그 말을 행동으로 옮겨도 책임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한 절대적인 규정이나 원칙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아주 많은 것들이 상대적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공정하시다고 알고 있는 우리가, 이 말의 의미 안에는 획일적인 것이라는 의미는 없다고도 알아들어야 합니다.

 

대단히 번영했고 환락적인 요소도 드러냈던, 도시 에페소에 살던 사람들이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바오로사도는 에페소에 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운 대로 살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바오로사도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사람은 배운 대로 삽니다. 돕는 일을 먼저 배운 사람은 그것을 우선으로 살 것이고, ‘멸망할 수도 있는 옛 인간의 마음자세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소리가 그 사람의 귀에 들려와도 그저 왔다가 스쳐가는 시끄러운 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말하는 배운 대로라는 말의 뜻과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이 가졌다고 생각할 자유는 아주 많지만, 그것이 올바로 드러날 수 있어야,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순수한 인간의 삶 앞에서나, 아니면 훗날 언젠가 우리가 일치하기를 바랄 하느님 앞에서나 그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갖는 생각이 올바를 수 있고, 그렇게 가진 생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실 하느님 앞에 올바로 다가설 수 있도록 도우심을 청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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