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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29: 로마와 동방교회의 수위권 문제 - 동서교회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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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20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29) 로마와 동방교회의 수위권 문제 - 수위권 갈등으로 동서교회 분열

 

 

- 오늘의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를 자처하며 로마교회와 동등한 품위를 주장했다.

 

 

[콘스탄티노플=김상재 기자] 지금은 유럽의 주도권이 서방에 있지만 고대에는 서방과는 비교도 안될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방이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을 주도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에는 더욱 그 비중이 높아졌다. 교회의 발전도 이런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있었다. 서방교회의 상징이랄 수 있는 베드로 대성당이 1626년에야 축성된 데 반해 동방의 소피아대성당은 537년에 축성된 것을 보아도 동방지역의 풍요로움과 문화적 수준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우위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로마교회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로마교회의 우위성은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에 의해 설립된 교회라는 사도전승에 기인한다. 이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에게 전달된 계시가 로마 주교에게 가장 확실하고 순수하게 보존됐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순수한 신앙에 대한 최대의 보증인 이 사실은 로마교회가 처음부터 타 교회들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게 해주는 근거가 됐다.

 

 

총대주교구의 기원

 

그러나 로마교회의 수위권이 완전하게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도들은 첫 포교 시기에 제국내의 중심도시와 속주의 수도 같은 대도시들에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정치문화 교역의 중심지인 이런 주요 도시들은 동시에 선교의 출발점이자 교회의 중심이 됐다. 그래서 속주의 여러 도시들은 수도인 대도시교회와 모교회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자연히 수도대교구의 주교들은 지방교회의 주교 선출이나 교회 규율을 감독했고 지역교회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안티오키아는 시리아에서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교회 안에 총대주교가 관할하는 관구가 생기게 됐다.

 

325년 니체아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교회의 위상을 고려하여 로마교회처럼 자신의 구역안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는 전통을 인정하고 동시에 신앙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의 특수한 위치를 고려해 서열상 4번째 교구로 지정함으로써 총대주교구 제도를 공의회 법률로 확인했다.

 

이후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자 이 도시 주교의 영향력이 확대됐고 새로운 제국 수도의 주교 위상이 문제로 대두됐다. 그래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로마라는 이유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보다는 높고 로마에 다음가는 명예적 지위를 허용했다. 이리하여 교구서열이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순서가 됐고 공의회는 로마를 제외한 4개의 교구를 총대주교구, 교구장을 총대주교라고 칭했다.

 

이후 총대주교구들은 각각 그 주변 교회들을 지휘하여 거의 독립적인 교구를 형성하였고 각 교구별로 고유한 전례와 관습들을 발전 시켰다. 그러면서도 신앙교리의 일치로 그리스도교를 통일시키고 있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 붕괴이후 러시아가 자신을 그 후계자 제3의 로마로 자처하며 총대주교구를 창설하고 1593년 동방교회 총대주교 4명이 이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이뤄진 것이다)

 

이리하여 동방교회는 총대주교구 체제에 의해 운영됐지만 신앙과 관련한 로마의 우위성은 그대로 인정됐다.

 

 

로마교회의 수위권

 

3세기까지의 교회는 공동체에서 생기는 많은 문제와 갈등에 대하여 로마의 주교에게 문의하여 확답을 바랐고 교부들이나 이단자들도 로마의 지지를 얻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천도이후에도 로마교회의 대표성은 계속 유지됐다. 신앙교의를 확정한 고대의 4대공의회가 비록 황제의 주도 하에 개최됐지만 교황사절의 참여와 지위가 보장됐고 교황의 동의가 있어야 공의회의 결정이 유효했던 점등은 로마교회의 대표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그러나 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위상과 영향이 강화되면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는 독자적 자치권과 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 로마교회와 동등한 권위를 요구하게 된다.

 

451년 칼체돈공의회는 신로마이자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는 로마의 주교와 동등한 품위를 갖는다고 결의했다. 또한 599년에는 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가 이러한 이전 공의회 결정들을 근거로 '전 세계 총대주교'라는 직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에 의존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속 권력에 의존한 이러한 인위적 권위는 점차 정치와 종교가 밀착될수록 황제의 세력권 안으로 휩쓸려 들어가 자주성을 잃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는 반대로 천도 이후 정치적으로 약화된 로마의 주교는 교회영역 안에서 오히려 자주적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요구가 강할수록 베드로까지 소급되는 신앙적 기초가 강조돼 로마 스스로 수위권 방어에 나서게 됨으로써 수위권 논쟁이 표면화 된 것이다.

 

특히 민족대이동의 강풍 속에서 레오 대교황 등 로마의 주교들이 이민족들의 침입을 몸으로 막아내고 폐허가 된 도시를 복구하며 시민들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자 로마교회의 지위는 서방교회 안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동방교회는 로마의 명예적 대표성은 인정하면서도 재치권은 인정하지 않는 제한적인 관점에서 로마의 대표성을 인정했고 때로는 마찰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이슬람의 침입, 교황령의 건립 등 뒤바뀐 사회적 상황과 수위권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동서교회가 분열하고 만다.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자각은 속권도 함께 주도하는 교황의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폐해를 낳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적인 서구라는 중세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26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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