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이국승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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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8-31 ㅣ No.1357

[124위 시복 특집] 이국승 바오로(1772~1801년)


“당신들은 나를 동정하는 것 같은데, 참으로 불쌍한 것은 당신들이오.”



‘성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국승 바오로는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습니다. 장성한 뒤 천주교에 대해 듣게 된 이국승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권일신을 찾아가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이국승은 1795년의 을묘박해 때 체포되었지만 아직은 순교에 이를 만큼 신앙이 영글지 않아 배교의 말을 하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석방된 그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보속을 위해 전심전력 하였습니다. 한편 이국승의 부모가 그를 혼인시키려 하자, 가족 때문에 본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한 이국승은 동정을 지키며 살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했습니다. 한양에서 이국승은 훈장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했습니다. 1797년 이후 이국승은 황사영의 집에 유숙하면서 총회장 최창현, 명도회장 정약종 등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며 함께 교리를 익히는 한편, 열심히 교회의 일을 돕는 가운데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가르친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입교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습니다. 때문에 1801년 신유박해 초기부터 포졸들은 이국승의 존재를 들어 알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된 이국승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국승이 옥에 이르렀을 때 마침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국승은 “배교한 것은 제가 아니고, 마귀가 저를 속여 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라고 관장에게 고하라며 고광성을 권면했고, 고광성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국승 또한 형벌과 문초를 받는 동안 여러 차례 고광성과 같은 일을 겪어야만 했고,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습니다. 하지만 관원이 고문을 그치고 석방하려고 할 때에 뉘우치는 마음이 생긴 이국승은, 풀려나면 곧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종교를 신봉하겠다고 외쳤습니다. 여러 차례 이런 유감스런 장면이 되풀이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적 약점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이국승의 진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속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의 교만과 스스로에 대한 과신(過信)을 모두 정화하신 뒤에야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의 영광에 이르는 데 필요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결국 이국승은 1801년 7월에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거기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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