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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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최인철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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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8-24 ㅣ No.1355

[124위 시복 특집] 최인철 이냐시오(?~1801)


“사학의 괴수로 서울에는 최인길, 최창현, 최필공, 최인철이 있고 지방에는 윤유일과 이존창이 있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철 이냐시오는 1795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인길 마티아의 동생입니다. 일찍이 형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최인철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791년 신해박해 때 형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습니다. 그때 형조에는 이미 여러 동료들이 끌려와 있었는데 최인철은 동료들과 함께 협박과 회유, 형벌을 번갈아 받아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형 최인길과 몇몇 신자들은 굴복했지만 최인철은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최인철 등 뜻을 굽히지 않는 자들을 풀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였고, 임금 정조는 “필부의 뜻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니 3일간 말미를 주어 집에서 스스로 뉘우치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최인철이 집으로 돌아오자 늙은 어머니와 형제들은 눈물을 흘리며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최인철은 사흘 뒤 관가에 나가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돌려 “비록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며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정조 임금의 회유를 받아들여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석방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형과 함께 교회의 일을 도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형 최인길이 주문모 신부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한 뒤 최인철은 교회 지도층의 일원이 되어 더욱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던 사람이 “사학의 괴수로 서울에는 최인길, 최창현, 최필공, 최인철이 있고 지방에는 윤유일과 이존창이 있다.”고 진술할 정도였습니다.

1801년 최창현과 최필공의 체포 소식을 듣고 신변에 위험을 느낀 최인철은 외숙모의 집에 피신했지만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에도 그는 10년을 지켜온 신앙을 배척할 마음이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에게 다음의 다섯 가지 죄목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첫째 1791년에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린 죄, 둘째 형이 매 맞아 죽은 뒤에도 천주교를 신봉한 죄, 셋째 동료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널리 전파한 죄, 넷째 체포된 뒤에도 천주교 교리를 훌륭하다고 설명한 죄, 다섯째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그를 섬긴 죄. 1801년 7월 2일, 최인철은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8월 24일 연중 제21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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