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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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에 대한 믿음, 목숨으로 지킨 순교자들 - 전라도, 강원도에서 순교한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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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8-12 ㅣ No.1339

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을 앞두고 ③ 하느님에 대한 믿음, 목숨으로 지킨 순교자들



라도에서 순교한 순교자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는 고종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됐다. 그는 스스로 교회서적을 구해 읽고 3년 후 친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 이종사촌 권상연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또 친척인 유항검과 자주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권상연 야고보는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97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신주를 불사르고 자신들에게 어머니와 고모가 되는 분이 사망하자 제사 대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를 알게 된 조정에서 그들을 체포하려 했지만 못하자 숙부를 잡아갔다. 숙부가 투옥된 사실을 안 윤지충과 권상연은 제 발로 관아를 찾아가 자수했다. 끊임없는 배교의 권유에도 그들이 꿈쩍도 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그들을 전주 감영으로 이송시켰다. 이튿날부터 혹독한 고문과 문초를 당하며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천주님을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다.”고 거듭 대답했다. 사형판결문이 도착하자, 즉시 형장으로 끌려간 윤지충과 권상연은 차례대로 칼날을 받고 순교했다.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 유항검의 자녀를 가르치면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주문모 신부가 전주를 방문했을 때 성사를 받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유항검과 체포된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고 한양에서 다시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어 며칠 후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김천애 안드레아는 유항검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신분을 뛰어 넘어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박해가 일어나자 유중철과 체포된 김천애는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배교와 밀고를 강요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 마티아는 일찍이 윤지충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지만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는 충청도 한산에서 이존창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한산으로 피신했지만 이때 자신이 입교시킨 신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문초 당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 체포됐다. 그는 무장, 전주, 그리고 동료들과 한양으로 압송됐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어 며칠 후 개갑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최초의 신자로 이번 시복식에서 함께 시복되는 유중철, 유문석의 아버지이며 이순이의 시아버지인 동시에 유중성이 조카이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모두에게 모범을 보이고 가난한 이웃과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했을 때 유항검을 전라도 지역의 신부 대리로 임명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미사를 집전했지만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 성무활동을 중단했다.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일에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789년 말 밀사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일체 헌납했다. 또 제사 금지령에 동참한 유항검은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되기도 했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체포됐고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몰렸지만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기에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 않고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안 박해자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했고 유항검은 다시 전주로 옮겨져 45세에 능지처참으로 순교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형이 순교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재의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했다. 그는 교회서적을 필사하고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또한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은 후 교회의 밀사 황심을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동참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난 후 그의 활동이 관청에 알려져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혔다. 당시 박해자들은 교회 밀사가 북경을 왕래하는 이유를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주로 다시 이송된 그는 1801년 10월 능지처참으로 순교했다. 그가 순교한 뒤 그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됐다.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이익의 외순 이윤하의 딸 이순이 루갈다는 동정부부로 부모 앞에서 동정서약을 했다. 이후 부부는 동정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함께 극복하며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다가 신해박해 때 먼저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힌 유중철은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는 고통을 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앙을 굳건이 지켰다. 그해 9월 중순 이순이 또한 나머지 가족들과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가 함께 갇힌 가족들에게 순교의 길을 가자고 권면했다. 이순이는 1802년 1월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고 유중철은 그녀보다 앞서 1801년 11월 2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유문석 요한의 아버지는 유항검이고 형은 유중철, 형수는 이순이이다.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난 유문석은 먼저 체포된 형의 옥바라지를 했지만 얼마 후 체포됐다. 가족들과 순교를 약속한 그는 형과 함께 17세의 나이에 교 수형으로 순교했다.

유중성 마태오는 유항검의 조카로 신앙공동체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자가 됐다. 그는 사촌 형수 이순이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체포된 후 순교를 약속하고 18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경언 바오로는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와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의 동생이다. 그는 언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했고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의 곤경을 덜어 주려고 노력했다. 또한 명도회 회원으로 학식과 재주를 이용하여 교회서적을 베끼거나 상본을 모사했고 이를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며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북경을 왕래하는 밀사들의 경비를 마련하는 데 노력했다.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자신이 나누어 준 서적과 상본 때문에 고발당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했다.

이일언 욥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어 관장의 눈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물도 얻어 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10년을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지만 이를 참아내면서 참다운 신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12년 동안 옥살이를 했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의 시아버지 신태보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는 사촌 요한을 비롯하여 다른 교우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의논하는 등 당시 가장 시급한 성직자 영입을 위해 힘쓰며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이에 직접 전교에 나선 그는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생활을 하다 1827년 정해 박해 때 체포되어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태권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유배 간 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이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이 삼촌이다. 그는 아홉 살인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고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됐다. 1802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되어 심약한 마음에 또 배교했지만 계속해서 천주교의 본분을 지켜 나가며 교회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다시 체포된 그는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정태봉 바오로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5촌 당숙 손에서 자랐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이 그의 사촌이다. 1827년 정해박해 때 밀고자의 고발로 체포된 후 전주로 압송되어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기 해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의 형 김대권 베드로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웠지만 열심히 수계하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였다. 그는 주일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수계하는 데 열중했으며 대축일이면 근처 산에 올라가 기도하면서 밤을 새웠다. 또한 사순시기 때에는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고 하루에 한 끼 식사만 했다. 그러던 중 동생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순교로 동생의 뒤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는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전주 옥에 12년 동안 갇혀 있다 기해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모녀지간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박해 때 전주에서 체포되어 온갖 형벌을 받았다. 김조이가 문초를 받고 옥으로 돌아온 딸 이봉금에게 “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 낼 힘이 없어 틀림없이 배교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하자, 이봉금이 “어떤 시련을 당해도 신앙 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김조이는 옥중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옥중에서 사망했고 이봉금은 배교하라는 회유에 굴복하지 않자 한밤 중에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 12세를 넘지 못했다.

심조이 바르바라는 기해박해 때 자신의 집으로 피신 온 교우들을 헌신적으로 거두었다. 그러나 얼마 후 시아버지 홍재영과 함께 살던 교우들과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뒤 옥에 갇혔다.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모진 고문을 견디던 그녀는 눈앞에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한 그녀는 결국 형벌의 상처와 이질로 옥중에서 순교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운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체포됐지만 배교를 하고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오랫동안 냉담을 하다 은총의 힘으로 신앙을 다시 찾고 이전의 잘못을 보속하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집을 피신 온 교우들에게 개방하고 그는 더욱 순교 원 의를 불태웠다. 교우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모진 형벌에도 흔들리지 않고 1840년 1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의 딸 최조이 바르바라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도 있었지만 기해박해 때 홍재영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체포되어 1840년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조이 막달레나는 남편이 일찍 죽어 과부가 되었지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시부모에게 효를 다했고 천주님께 늘 감사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자발적으로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했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힘썼으며 무지한 이들을 기꺼이 가르쳤다. 기해박해 때 피신한 홍재영의 집에서 잡혀 동료들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한 오종례 야고보는 1839년 7월 전주에서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24위 중 유일한 사제 순교자

중국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구베아 주교의 명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최인길의 집에 머물며 한글을 배웠고 이듬해 부활 대축일에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그러나 얼마 뒤 입국 사실이 탄로 나자 강완숙 회장의 집으로 피신했다. 주 신부는 이때부터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하고 여기 저기로 옮겨 다니며 성사를 베풀고 신자들의 교리공부와 전교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했다. 또한 교리서를 집필하며 조선에서 6년을 보내는 동안 조선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지만 신유박해로 신자들을 잃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어 주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에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해 귀국을 결심했지만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강원도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장성한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김강이 시몬은 용맹하고 재산이 많았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동생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다 그곳을 방문한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다. 을해박해 때 옛 하인의 밀고로 동생과 조카 김사건과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원주로 이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그러나 심한 상처와 옥중생활에서 얻는 이질로 사형집행이 내려 오기 전에 옥사했다.

최해성 요한은 최경환 성인의 먼 친척으로 본래 충청도 홍주에서 살았지만 신유박해 때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따라 갔다. 그는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 뛰어난 열성을 보였으며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는 한편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애긍을 잊지 않았다.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최 비르지타는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신유박해 때 남편이 황사영을 숨겨 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도 따라 갔다가 남편이 병들어 죽자 대세를 줄 사람이 없어 스스로 대세를 주고 원주에서 순교한 조카 최해성의 집으로 갔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조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옥으로 찾아갔다가 발각되어 갇혀 고문을 받았다. 이에 굴복하지 않자 박해자들은 그녀를 옥에 가두어 굶겨 죽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4개월 후에도 굶어 죽지 않자 또다시 ‘3일 안에 굶겨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3일 안에 굶겨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안 박해자들이 마지막 날 밤 목을 졸라 죽였다. 그녀 나이 56세였다.(참고문헌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초상 제공 :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앞두고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들여다 보는 묵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는 8월 16일(토) 시복식을 거행하고 나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는 복자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이날 시복되는 순교자들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사셨던 순교자들의 순교적 삶을 따라 살 수는 없어도 현재의 일상 안에서 믿음을 굳건히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청해보자.

[월간빛, 2014년 8월호, 김선자 수산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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