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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유박해의 배경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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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48

신유박해의 배경과 의의

 

 

1. 박해의 배경

 

한문으로 간행된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 관련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처음으로 조선에 전한 사람은 선조(宣祖)대에 지봉(芝峰) 이수광(李P光)이었다. 그러나 이들 한역서학서는 근 100년 이상이나 유학자들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역서학서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 유학자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이었다. 그는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를 선비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소양의 일부로 생각하였다. 또한 사회의 도덕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실천 위주의 도덕 교육을 강조한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도 유교를 보충하는 면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이러한 남다른 생각을 바탕으로 다방면의 천주교 서적과 서양 과학 기술 서적을 적극적으로 탐구한 결과 그는 서양 과학 기술이 중국의 그것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중국 중심의 화이관(華夷觀)을 극복하고 오히려 서양을 세계의 중심으로 이해함으로써 서양의 선교사와 서학(西學:천주교 포함)을 성인과 성학(聖學)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서학에 대한 선진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이익은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계몽하여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익의 영향으로 성호학파 내에서 서학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서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마침내 소장 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승훈(李承薰)이 이벽(李檗)의 권고로 북경에서 영세하고 1784년 3월 말경(음력:이하 같음)에 귀국한 뒤 북경에서 가지고 온 여러 천주교 서적을 이벽과 함께 연구하여 교리에 통달한 다음 친척과 친구들에게 전교함으로써 서울에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천주교는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경기, 충청,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도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또한 신자 층도 양반뿐 아니라 중인이나 하층민까지 다양하게 포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천주교가 급속도로 전파되어 나간 것은 서학이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인격적이고 주재적인 천주의 설이나 서양 과학 기술은 당시 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부국 강병을 이룩할 새로운 사상 체계를 모색하고 있던 남인 실학자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찰나적인 현세보다 죽은 다음에 천당에 올라 누리는 영원한 복락(福樂)을 더 중시하는 천주교의 내세 사상은 사회적 모순의 심화로 더욱더 고통을 겪게 된 서민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천주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주장 또한 당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고 있던 중인 이하의 신분 층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며, 교회에서 교회법에 입각하여 축첩과 중혼을 엄격히 금지하고 결혼에 있어서 당사자의 의사에 반대되는 억혼(抑婚)을 금지하는 것, 그리고 재혼을 금지하지 않고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 등도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어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게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의 내용은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인 주자학(朱子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주자학에서는 비인격적인 태극(太極)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는 데 반하여 천주교의 한역서학서에서는 주자학의 태극에 관한 학설을 정면으로 배척하고 인격적인 천주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안배하고 다스린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현세를 경시하고 죽은 다음에 천당에 올라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내세에 주된 초점을 맞추어 죽은 다음에 복을 받고 벌을 면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천주께 기도하고 간구하며 예배하고 미사를 드리는 등의 방식으로 천주를 공경한 데 반하여 주자학에서는 마음이 항상 이기적인 욕망에 이끌리지 않고 공정한 이치에 따라 발동하게 하는 공부를 통해 현세에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인생의 주된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주자학의 입장에서 보면 현세를 경시하고 사적인 자신의 구원을 바라는 천주교는 반사회적이고 반교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신후담(愼後聃), 안정복(安鼎福) 등의 유학자들은 일찍부터 [서학변](西學辨), [천학문답](天學問答) 등을 저술하여 천주교를 불교와 같은 사설(邪說)로 배척하여 척사론(斥邪論)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척사론은 그후 정치적인 문제와 어우러지면서 신유박해를 초래한 척사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게다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당시의 신자들은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함으로써 주자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이 1790년(정조 14년) 조선에 전해질 때만 해도 소수의 신자들만이 그 금령에 따라 조상 제사를 폐지하였으나, 1794년(정조 18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여 천주 신앙과 조상 숭배의 병행이 불가함을 명백히 하면서부터 신자들은 모두 다 조상 제사를 폐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효를 중시하는 당시의 지배적인 이념인 주자학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의 윤리 강령과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패륜적인 것으로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나 관장이나 군주보다 천주를 더 높이고, 천주의 법을 부모나 관장이나 군주의 명령보다 더 우위에 두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따르는 천주교 신자들은 배교하라는 부모나 관장이나 군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이와 같이 부모와 관장과 군주를 상대화시키는 신자들의 태도는 당시의 통치 질서나 윤리 질서와 배치되는 것으로서 당시 사회에서 배척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천주교의 반체제적인 면들도 신유박해를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천주교 교리 자체에서 신분 제도의 철폐를 주장하거나 직접적으로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이는 천주의 자식이므로 형제같이 지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신도들 각자 양심 성찰을 통해 평등 사상을 솔선 수범하였다. 이러한 천주교의 평등 사상은 당시의 신분 질서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회의 최고 통치자인 교황이 현자(賢者) 중에서 선출된다는 [천주실의](天主實義)의 설명이나 천주교에서는 재능을 근거로 한 관리의 충원이 시행되므로 천주교가 조선에 널리 행해지면 서양의 교황이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인재를 취할 것이라는 신자들의 믿음도 당시의 통치 체제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 또한 교회법에 입각하여 축첩과 중혼을 엄격히 금지하는 것이나 결혼에서 당사자의 의사에 반대되는 억혼을 금지하는 것, 재혼을 금지하지 않고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 등도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과 크게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신도들이 정부 당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이향(離鄕)을 단행하고 산곡(山谷)에 은거하자 정부 당국자들은 천주교 세력을 황건적이나 백련교도들과 같이 국가의 질서에 대해 저항하는 반란자의 무리로 의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의 반체제적인 면들은 집권 세력에게 천주교에 대해 강한 위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이 정조(正祖)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해 주던 세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던 점도 집권 세력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조는 노론(老論)을 중심으로 한 장기 집권 가문, 곧 벌열(閥閱)이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켜 나감으로써 왕권을 제약하고, 백성들의 생활과 국가의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고, 많은 양반들을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등 갖가지 사회적 모순을 야기하는 벌열 정치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자신의 개혁 정치를 보필할 정치 세력의 하나로 정조는 남인(南人)을 선택하였으며, 당시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濟恭)은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인물들을 중용하여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이가환(李家煥), 이기양(李基讓),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 정약전(丁若銓), 홍낙민(洪樂敏) 등의 성호학파의 인물들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성호학파의 인물들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전적으로 노론의 벌열 정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벌열 정치를 타파하고 주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성호 이익의 실학(實學)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정조의 개혁 정치를 잘 뒷받침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서양 과학 기술을 널리 탐구하고 더러는 천주교를 수용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백과 사전적인 지식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돕는 데 두루 활용되었다. 특히 정조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수원성을 축조할 때 정약용은 서양 과학 기술을 이용해 기중기를 제작하여 사용하게 함으로써 경비를 대폭 줄일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경비 조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와 같이 실학과 서양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정치 세력에 대해 노론 벌열은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1791년에 전라도 진산에 사는 진사(進士) 윤지충(尹持忠)이 모친 권씨가 별세하자 그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정성으로 장례는 치렀으나 혼백이나 신주는 세우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정조와 채제공 일파에게 정치적 위협을 받고 있던 노론과 채제공 일파에게 정치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던 일부의 남인들은 진산 사건을 계기로 하여 채제공 일파를 신서계(信西系)로 몰아 모두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연일 상소를 올려 사건을 확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낙안(洪樂安), 이기경(李基慶) 등의 공서계(攻西系)는 노론 벽파(僻派) 세력인 김종수(金鍾秀), 심환지(沈煥之) 등과 연결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채제공이 자파의 인물들을 보호하고자 하였고 또한 정조도 자신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해 줄 세력을 보호하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에 사건은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 사건의 당사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진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 뒤에도 채제공 일파를 신서계로 몰아 제거하고자 하는 노론 벽파와 공서계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채제공은 1792년(정조 16년) 자신이 주도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와 이듬해 자신이 올린 상소에서 사도 세자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어야 한다는 임오의리(壬午義理)를 남인의 공론으로 내세우며 노론 벽파와 공서계에 강력히 대항하였다. 그리고 정조도 사도 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英祖)의 후회가 담긴 금등(金藤) 문자를 공개하여 채제공을 적극 옹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1795년 봄에 백관(百官)을 모아놓고 오늘 소인을 물리치고 군자를 등용하여 백성의 뜻을 크게 안정시키겠다고 선언하면서 채제공을 좌의정(左議政)으로 삼고 대사성(大司成) 이가환을 공조판서(工曹判書)로 발탁하였다. 그리고 노론 벽파와 공서계가 채제공 일파를 공격할 경우 적극적으로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게다가 정조대에 크고 작은 박해가 서울과 경기, 충청도에서 계속되었음에도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비교적 관대한 정책과 1794년(정조 18년)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의 전도 활동에 힘입어 오히려 교세는 더욱더 확대되어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날 무렵에는 신자 수가 1만 명을 돌파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세의 확대와 채제공 일파의 강경 대응,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정조의 적극적인 보호 정책에 노론 벽파와 공서계는 강한 위기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정조가 세상을 떠날 경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날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 박해의 전개 과정

 

정조가 1800년(정조 24년) 6월 28일 세상을 떠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은 갑자기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純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대왕대비 김씨가 후견인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영조의 처사를 지지한 노론 벽파에 속한 대왕대비 김씨는 11월 하순 선왕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사도 세자의 죽음을 동정한 시파(時派)의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그 자리를 벽파의 사람들로 채웠다. 그런 다음 대왕대비 김씨는 1801년 1월 10일 회개하지 않고 엄한 금령을 어기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역적으로 다스리고, 아울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잘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처벌하라는 공식 박해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최필공(崔必恭), 최창현(崔昌顯),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鍾), 정약전, 이기양 등이 차례로 붙잡혀 가 국문을 당하였다. 또한 내포 지방의 사도인 이존창(李存昌)과 포천 지방의 전교에 공이 큰 홍교만(洪敎萬)도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여성 회장 강완숙(姜完淑)도 체포되었다. 대부분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들이거나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인 이들 가운데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이승훈, 홍교만, 강완숙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존창은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으며,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장기현(長3縣)과 신지도(薪智島)로 각각 유배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3월 12일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진술로 김건순(金健淳), 이희영(李喜英) 등이 계획했던 해도행(海島行)이 드러나고, 또한 주문모 신부가 강화도에 유배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인)의 처와 며느리가 거처하는 폐궁(廢宮)을 출입한 사실이 드러나자 정부 당국자들은 그가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을 모아다가 모반을 꿈꾸는 것으로 판단하여 박해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특히 3월부터 시작된 전주 지역의 박해로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윤지헌(尹持憲), 이우집(李宇集) 등이 서양의 군함을 불러들이려고 했던 계획이 탄로나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서양 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한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이 불거지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더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정부 당국자들은 유항검 등과 황사영이 서양 군함을 불러들이려고 한 사건을 통해 천주교 신자들이 반란을 기도한 역적의 무리임을 입증하고 박해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황사영과 그와 관련된 자들에 대한 신문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을 무렵 동지사(冬至使)가 출발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조선 정부는 진주사(陳奏使)를 파견하여 신유박해 전반에 관한 청나라의 이해를 촉구하고,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따른 청나라 측의 반발을 예방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는 조윤대(曺允大)를 동지사 겸 진주사로 임명하고, 가지고 갈 "토사주문"(討邪奏文)을 대제학 이만수(李晩秀)에게 작성하게 하였다. 또한 주문 내용을 입증할 증거로 불리한 내용을 삭제한 [백서], 곧 "가백서"(假帛書)도 갖고 가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단락되자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를 박해한 일을 종묘(宗廟)에 고하게 하고, 이미 내려진 사형 선고를 즉시 집행할 것과 미결 사학 죄인의 심리를 연말까지 시급히 끝내고 더 이상 새로운 기소를 하지 말라고 명하였고, 국청(鞫廳)도 해체하게 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12월 22일 반포하였다. 이렇게 해서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유박해로 희생된 신자들의 수는 기록에 따라 약간 다르나 대체로 처형된 자 1백 명, 유배된 자 4백 명, 합하여 5백 명 정도로 추산된다. 기록에 누락된 자들까지 합치면 희생자 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3. 박해의 교회사적 의의

 

신유박해로 조선의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물론 신유박해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박해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일부의 신도들에 국한된 부분적인 박해였다. 그러나 신유박해는 조선의 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교회를 거의 폐허화시켰다. 어렵게 영입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유방제(劉方濟:중국 이름은 余恒德) 신부가 1834년(순조 34년)에 입국할 때까지 목자 없는 교회의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지도층 신도들이 거의 다 순교하거나 유배되거나 생명 유지를 위해 산간 벽지로 피신하고 교회 서적들도 거의 다 압수됨에 따라 교회는 거의 빈사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토역반교문"의 반포로 천주교를 언제라도 박해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됨에 따라 교회를 재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서양 군함 등을 요청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드러나면서 천주교는 반인륜적인 종교라는 인식에다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인식을 더하게 됨으로써 천주교는 물론이고 발달된 서양 과학 기술까지도 배척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과학 기술은 낙후된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근대화의 기회도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노론 벌열의 천주교 탄압은 일시적인 성공에 불과하였다. 신유박해에 뒤이어 세도(勢道) 정권이 출현함에 따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더욱더 심화되었고, 이미 한계를 드러낸 주자학은 여전히 지배적인 이념으로 기능하고 있는 상황에서 몰락할 처지에 놓여 있는 양반이나 양반 중심 신분제의 질곡에서 신음하고 있는 중인 이하의 신분 층들에게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은 여전히 복음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대대적인 신유박해가 있었지만 오히려 천주교 신앙은 한층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살아 남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간 지방으로 숨어들어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또한 죽음을 눈앞에 둔 순교자들의 용기와 귀양간 신자들의 인내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어 그동안 신앙의 불모지였던 전라남도와 남쪽의 도서 지방, 그리고 경상도를 벗어나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 등 온 나라의 아주 궁벽한 구석까지 천주교 신앙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전국에 걸쳐 널리 분포한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과 수계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심산 궁곡으로 숨어 들어가 산중 교회인 교우촌이라는 신앙 공동체를 본격적으로 형성하였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교우촌은 박해 시기 내내 교회와 신앙을 지탱해 주는 바탕이 되었다. 신유박해는 일시적으로는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천주교가 더욱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신유박해를 거치면서 민중 신앙으로서의 성격이 더욱더 강화된 점도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물론 신해박해를 계기로 중인 이하 신분 층에 속한 신자들의 교회 내 역할과 비중이 이전보다 크게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양반 신자들이 적지 않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유박해를 겪으면서 그들 양반 신자들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배교하고 귀양을 감에 따라 스스로 양반의 자격을 포기한 민중적 양반이거나 중인 이하의 신분 층이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제 천주교 신앙은 주로 하층민들을 통하여 전파되어 나갔다. 이로써 교회의 민중적인 성격은 더욱더 뚜렷해지게 되었다.

 

[사목, 2001년 9월호, 서종태(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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