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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생활 현장 중심의 복음화 대책: 직장선교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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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40

생활 현장 중심의 복음화 대책


직장선교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

 

 

I. 머리말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내리신 이 분부를 교회는 자신의 본연의 사명으로 삼아 수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이 사명은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를 궁극적으로 완성하실 그때가 오기까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결같이 수행해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복음 선교란 단지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쳐 세례를 주고 교회 안에서 성사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을 말한다. 말하자면 복음 선교는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현대의 복음 선교, 18-19항).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수행하는 복음 선포는 세 가지의 상호 연결된 차원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들을 교회 공동체로 인도하는 일이다(교회의 부식<부식>). 둘째, 이미 교회의 일원인 신자들이 더욱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할 있도록 그들의 모든 생활을 복음화하는 일이다(교회 공동체의 내적 복음화).

 

셋째, 교회가 선포하고 실천하는 복음으로써 사회 전체를 그 뿌리로부터 복음의 정신으로 충만하게 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 차원은 비록 구별할 수는 있지만 서로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차원을 온전히 수행하는 일을 ‘문화의 복음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선교 이해에 입각하여, 생활 현장 중심의 복음화 대책에 관해서 고찰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생활 현장 중심의 복음화 대책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다음, 생활 현장 중심의 복음화를 위한 대책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생활 현장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생활 현장이란 글자 그대로 사람이 활동하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생활 현장이란 따라서 가정?직장?본당?단체 등 일상 생활을 하는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생활 현장이란 ‘직장 선교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이라는 부제(부제)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직장 또는 직업을 중심으로 하는 다소 좁은 의미의 생활 영역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이 글에서는 생업의 터전이 되는 생활 영역에서의 복음화 대책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직장 선교’라고 할 때 그 의미가 직장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한정될 우려가 있어 ‘생활 현장’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생활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는 이 글을 전개해 나가는 가운데 좀더 명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II. 생활 현장 중심 복음화 대책의 필요성

 

1. 복음화의 구체적인 터전인 직업과 직장

 

200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회는 300만 명의 교세를 가진 놀라운 공동체로 발전했다. 대도시 본당의 경우에는 주일이면 거의 모든 성당이 신자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각종 신심 단체들과 사도직 단체들의 활동 또한 눈부시다. 세계 대부분의 교회가 성소의 감소로 신학교의 문을 닫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교회는 ’80년대 이후에만 대구 · 수원 · 부산 등 3개 교구에서 신학교를 새로 세웠고, 대전과 인천 교구에서도 곧 신학교를 설립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제3세계 교회들은 줄지어서 한국 교회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고, 우리는 지난날에 받았던 도움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는 여전히 선교 지역에 속한다. 한국 교회의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6.7%에 불과하고, 한국 전체의 종교 인구 54% 중에서도 10.8%에 불과한 소수 종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우리 교회는 선교의 급격한 둔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성인(성인) 영세자 비율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고, 이와 반대로 냉담자나 거주 불명자의 수는 자꾸 증가되어 가고 있는 경향이다.

 

이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심각한 병리 현상이다. 금전 만능의 물질주의와 권위주의가 고질화된 지 오래이고 망국적인 지역 감정 또한 가시지 않은 채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탈법 · 불법 · 과소비 · 향락 · 사치 풍조가 범람하고 있으며, 낙태와 환경 오염 등 반생명적인 문화가 극을 치달리고 있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하기보다는 당리 당략에 급급하고 있고, 가진 자들은 남이야 어찌 되든 자기 잇속만 더 채우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반복음적인 문화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복음화의 시급한 과제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복음화의 제일선을 담당하는 일은 다름아닌 평신도의 사명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를 “현세적인 일에 종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 나라를 찾도록 불린 이들”로 정의하면서 평신도의 특성을 “세속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교회 헌장 31항). 따라서 반복음적인 가치와 생활 양식이 만연한 우리 사회를 복음의 힘으로 바로잡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평신도들은 “하느님의 구원의 소식이 온 세상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한테 인식되고 수용되도록 노력할 전반적 의무와 권리가 있다. 이 의무는 사람들이 그들 평신도들을 통하여서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하다. 그리고 각자는 자기의 고유한 조건에 따라 현세 사물의 질서를 복음 정신으로 적시고 완성시켜, 특히 현세 사물을 처리하거나 세속 임무를 집행하는 중에, 그리스도를 증거할 특별한 임무도 있다”(교회법 제222조). 평신도들이 이 같은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때 교회는 희망과 사랑의 표지요 원천으로서 세상의 모든 분야에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 가장 구체적인 장소는 어디인가. 바로 가정과 직장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가정과 본당 공동체의 복음화에 대해서는 많이 강조를 하면서도 실제로 평신도들이 가장 많이 부딪치고 몸담고 있는 직장의 복음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신자들은 직장이나 직업을 생계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고, 직업 현장에서의 복음화 노력에 대해서는 본당에서의 활동에 비해 이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하루 생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직업 현장은 복음화의 가장 구체적인 장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 복음화와 요원하다면, 그것은 평신도들이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직업 현장에서 복음화를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거나 오히려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윤리가 타락했다면 신자 정치인들이 그렇게 되도록 방조하거나 묵인한 것이 적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경제 정의가 실천되지 않고 있다면, 그 분야에서 활동하는 평신도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경우 사회 지도층에 있는 신자의 비율은 전체 인구 중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금배지를 단 신자 국회의원 수만 해도 전체 국회의원의 17%를 차지하는데, 이는 전체 인구에 대한 신지 비율의 2.5배가 넘는 수치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복음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순전히 평신도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교회와 사목자들이 충분한 사목적 배려를 하지 못한 데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최근 시한부 종말론이 사회적 물의를 빚었을 때에 교회 언론이 마련한 좌담회에 참석한 한 신부는 “신자들이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사이비에 빠지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교회의 직무 유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것이 비단 시한부 종말론에만 관계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충실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가르치기보다는 교회 자신의 일만 더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봄 직하다.

 

2. 본당 중심 구조의 한계

 

오늘날 한국 교회는 특히 대도시 지역일수록 본당 구조의 비복음화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한마디로 대형화와 중산층화로 특징지어지는 본당 구조의 이상(이상) 현상은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복음적 공동체의 본모습을 흐리게 하고 있다. 대형화는 신자들을 점점 익명의 집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본당이 대형화할수록 친교의 장(장)은 좁아지고 대신에 일사불란한 조직 체제만 강조될 뿐이다. 사목자들로서는 본당을 관리하기도 바쁜 마당에 신자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란 있을 턱이 없다. 중산층화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계층이 설 자리를 잃어 가게 만들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떠나는 교회가 어찌 나눔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일선 사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본당 신자들 중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신자는 10%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만큼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본당은 신자로서의 기본 의무인 한낱 주일 미사 참여의 장소로 전락하고 만 지 오래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수천 명을 대상으로 사목해야 하는 사제는 시간에 쫓기고, 그러다 보니 복음 선포의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강론 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기 십상이다. 더구나 사회는 날로 다양해지고 전문화되고 있다. 각계 각층이 망라된 신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필요한 메시지를 요청하고 있다. 전문 분야별로 사도직 단체들이 조직되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친목과 신심 위주로 움직일 뿐이지, 그들의 전문성을 복음의 빛으로 재조명하여 사도직 활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가르침만을 되풀이하는 사제의 설교가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다. 신자들의 주일 미사 참여율이 40%를 밑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그나마 주일 미사에도 참여할 수 있는 신자는 어쩌면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다. 주일도 없이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는 오늘의 사회 구조 안에서 생계 유지를 위해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주일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우리 주위에는 적지 않다. 대도시 지역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백화점 등 유통업계에 종사하는 신자들이다. 서울 명동 일대만 하더라도 이러한 유통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약 2만 명을 헤아리고 있고, 그중 1천 5백 명 정도가 신자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에게는 주말이 평일보다 훨씬 더 바쁜 ‘대목’이기에 주일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실로 영웅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이 같은 예는 비단 유통업계뿐만이 아니다. 영세 공장 근로자 · 아파트 경비원 · 광산 근로자 · 일일 고용직 노무자 등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일부 직장에서는 교우회를 조직해 일과가 끝나면 회사 공간을 빌어 미사를 드리고 있지만, 주말에 역시 ‘대목’을 맞고 있는 사제를 모시기가 쉽지 않다. 본의 아니게 주일 미사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냉담으로 이어지는 것은 쉽사리 예측할 수 있는 결과이다.

 

최근 들어 각 교구에서는 기존 본당 구조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기초 공동체의 활성화를 통해 새로운 복음화를 이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기초 공동체가 본당의 하부 조직인 반?구역 모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고, 또 본당의 지침들을 지시하거나 전달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어 ‘나눔과 사귐과 섬김’의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구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서울대교구의 경우 2천년대를 향한 사목 계획의 일환으로 ‘소공동체들의 교회’라는 새로운 기초 공동체 조직을 준비하고 있어 앞으로의 향방이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지역 중심의 생활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어, 다양하고 전문화된 현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요컨대 비인간화, 반복음화의 사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복음화의 선봉대인 평신도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전문화된 현실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 채 대형화와 중산층화의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본당 구조로 인해 다양하고 전문화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 모습인 것이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안고 있는 이 같은 문제와 한계들을 복음화 대책의 새로운 방향 전환을 요구한다. 그 중요한 한 가지로 이하에서는 생활 현장 중심의 복음화 전략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III. 생활 현장 중심의 복음화 대책


1. 근원적 출발점으로서의 평신도 영성

 

모든 그리스도교적 활동은 그리스도교적 영(영, πυευμα)의 정신에서부터 솟아 나와야 하며, 그 영의 향기를 풍기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영의 향기가 없다면 그 활동이 제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더라도 썩어 없어지고 말, 따라서 참다운 영에 의한 것이 아닌 활동이 되고 만다.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즉 복음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 주는 식별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점은 복음 선포의 제일선에 있는 평신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평신도들의 모든 사도직 활동은 그리스도교적 영성,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평신도의 영성에 비추어서 추진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평신도 영성이라는 단어는 별로 찾아볼 수 없고 평신도 사도직이란 말만 무성하다. 무언가 본말이 잘못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평신도 사도직을 내세우기 전에 평신도 영성부터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구원 진리를 받아들이고 생활화하는 삶의 총체적이고 신비적인 차원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총체적’이란 인간의 삶을 초자연과 자연, 영과 육의 차원으로 나누어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측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차원을 다 포함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본질적으로 사회성과 현실을 존중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다. 그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로 크게 구별되어 나타난다. 그 생활 양식이나 직분의 차이로 인해 평신도는 성직자나 수도자와는 다른 고유한 영성이 있으며, 이는 평신도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에 의해서 구별된다. 그 특징은 ‘세속적’인 데에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보살피는 사목자(성직자)나 복음 삼덕의 특별한 은총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보여 주는 수도자와는 달리, 평신도는 오로지 세속 안에서 살면서 세속을 통하여 이 당에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다. 평신도의 일은, “자신들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현세의 사물들을 비추고 관리함으로써…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자라서 창조주와 구세주에게 찬미가 되도록”(교회 헌장 31항) 하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신도 영성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어떠한가. 평신도의 영성이 올바로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은 영성과 열심을 혼동한다. 영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짚어 보고자 한다. 그 첫째는 수직적(종말적) 영성과 수평적 영성을 분리시키고 이원화하려는 경향이다. 이러한 사고는 이원론적인 낡은 세계관과 특히 수도자적 영성의 상대적 우위성에서 나온 것으로 세속을 경멸하고 현실 도피적인 패배주의적 인생관을 만들기 쉽다. 수직적 영성이란 그리스도인 삶의 경험적 현실을 뛰어넘는 차원을 가리키는 표현이지, 현세와는 별개인 내세적이고 초자연적인 다른 세계관을 지칭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점을 간과할 때 그리스도인 영성, 특히 평신도의 영성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꿈 속에서 현실을 가꾸려 하는 영성이 되고 만다.

 

둘째로는 이와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서, 신앙 생활과 일상 생활을 구분하고 신앙 생활을 교회 생활과 전적으로 동일시하려는 경향이다. 이렇게 될 때 사도직은 오로지 교회 생활(전례, 신심 행사, 예비자 권면 등 각종 교회 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고, 더욱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력이나 정의를 위한 투신 등은 신앙 생활과 무관하거나 적어도 이차적인 것으로 격하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을 고백하면서도 참 하느님의 모습을 오히려 가려 버리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되고 만다.

 

참다운 그리스도교적 영성, 특히 평신도의 영성이 생활 현장에서 신자들의 사도직 활동을 촉진하고 조장하는 근본 동인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가 거의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 왔던 평신도 영성을 신자들에게 올바로 교육시키지 못할 때 다른 어떤 대책도 그 효과를 제대로 낼 수 없을 것이다. 

 

2. 현장 공동체의 조직과 지원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본당 중심의 사목 활동으로는 사회의 복음화는 물론 교회 자체 내의 내적 복음화도 결코 도모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2백주년 사목회의 의안에서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주일에 각계 각층의 신자들이 본당에  모인다고 하여 한 형제 자매가 되거나 그들의 삶과 삶의 현장이 변혁되지 않는다. 대규모 군중 사목은 신앙과 생활의 일치, 밥상과 젯상의 일치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평신도의 첫 사명은 ‘현대의 질서를 바로잡는 삶’이어야 한다. 생활 현장에서 빛과 소금과 누룩의 소명을 실천해 감으로써 생활 현장이 성화되어 가야 하는 것이다…구체적 삶과 삶의 조건을 외면한 사목은 참사목일 수 없다”(2백주년 사목회의 의한 ‘특수사목 Ⅰ’ 65면).

 

따라서 계층별, 직업별, 직장별로 신자들의 사도직 공동체를 조직하고 확산시켜 나가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는 또한 “평신도들의 인간으로서의 요구와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요구에 잘 부합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내는 표지이기도 하다”(평신도 교령 18항). 이를 위해서 교회는 신자들이 각자 고유한 분야에서 사도직 단체들을 조직해 활동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적 소명을 촉진하기 위한 단체들을 임의로 결성하고 운영하며, 그 목적을 공동으로 추구하기 위한 집회를 가질 자유가 있기“(교회법 제215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평신도 단체들은 또한 교회의 친교 안에서 그 자유를 행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이른바 ‘교회성 기준’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는 교회 안에서 평신도 단체들을 평가하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화(성화) 소명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고, 교도권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인간에 관한 진리를 수용하고 선포해야 하며, 교황과 주교 및 교회 내의 모든 사도직 단체들과 이루는 진정한 친교를 증거해야 하고, 교회의 사도직 목적에 순응하고 참여해야 하며, 교회의 사회 교리에 따라 인간의 전인적 존엄성에 봉사하도록 투신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30항). 따라서 기존의 평신도 단체들이나 앞으로 사도직 단체들을 조직하려는 평신도들은 이 같은 기준에 딸 친교와 봉사, 복음 선포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증거해야 하고, 또 교회는 이 같은 정신으로 활동하려고 노력하는 단체들을 마땅히 지원하고 배려해야 한다.

 

3. 전담 사제의 파견 및 평신도 지도자 양성

 

생활 현장 중심의 사도적 단체들이 그 목적을 제대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교회의 사목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현재 서울대교구만 하더라도 교구의 인준을 받은 직장별, 직능별 사도직 단체들만 50여 개나 된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한 사람의 영적 협조자(지도 신부)가 1~8개 단체를 겸하는 경우도 있고, 영적 협조자가 아예 없는 단체들도 있다. 그나마 이들 지도 신부들은 하나같이 고유한 직책을 맡고 있어서, 효과적인 지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직업상 본당에서 주일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일부 직장인 단체들은 직장 내에서 미사를 하려 해도 사제를 구하지 못해 단체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형편에 처해있다.

 

따라서 평신도 단체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지도 신부나 전담 사제를 교구 차원에서 배려해 주어야 한다. 교구 사제의 수가 부족해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교구와 수도회가 협력해 공동 사목 전선을 펴는 것도 한 가지 대한일 것이다. 그리고 해당 단체를 맡고 있는 사제들은 그 분야에 대한 좀더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학교 시절부터 관심 분야에 맞게 전문적인 지식을 쌓도록 교육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서울대교구가 새 사제 학교를 시작하면서 분야별 현장 사목을 도입한 것은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해당 분야의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평신도 지도자를 교육하는 일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특히 전문 분야의 평신도 단체들은 그 고유의 세속적 영역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 않게 전문성을 띠고 있지만, 그 전문성을 복음의 정신에 비추어 재조명하고 구체적인 현장에서 복음화의 도구로 활용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과 혼란을 겪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지닌 전문적인 지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도자들을 선발하여 올바른 신앙 교육을 시켜 나가는 일이 시급하다. 전문성이 요구되지 않는 분야라 하더라도 직장별 직업별로 평신도 지도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구에서는 본당 중심의 사목에 바쁜 나머지 이 같은 문제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한국 교회 전체 차원의 종합적인 선교 사목 전담 연구 기관을 설치하는 것도 고려해 봄 직하다. 이 기관에서는 전문 연구진을 두어 분야별 특성에 맞는 선교 사목안의 입안과 기획, 지도자 양성 교육, 분야별 교육 자료의 연구 · 수집 및 보급 등의 일을 관장할 수 있을 것이다.

 

4. 직업 현장에서의 좋은 표양

 

직업이나 직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평신도들이 생활 현장에서의 복음화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참다운 삶의 표양이다. “현대인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는다. 스승의 말을 닫는다면 스승이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41항)라는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진정한 생활로 좋은 표양을 보이는 것이 복음화의 첫째 방법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직업인에게 좋은 표양이란 또한 자기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과도 직결된다. 직업은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교육시키며 노후를 대비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지만, 신앙인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에게 직업은 “세상을 다스리며 정복하라”(창세 1,26-28)는 말씀을 따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계속 수행한다는 소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명에 충실하는 것은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화의 사명을 이행하는 것이 된다.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생활하고 있는 신자 직업인들이 각자 맡은 일을 복음의 정신으로 성실히 수행해 나간다면, 이 사회의 복음하는 그만큼 앞당겨질 것이다.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비중 있는 직책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작고 보잘것없는 일을 묵묵히 이행한다면 그것은 곧 사회를 밝게 비추고 풍요롭게 하는 빛과 누룩의 역할을 하는 일이 될 것이다.

 

 

IV. 맺음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와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이요 도구”(교회 헌장 1항)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교회의 본지리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가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 또는 목적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급변하는 사회 현실 안에서 교회가 진정 구원의 표지가 되기 위해서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어 가는 사회는 교회에게 시대의 징표를 헤아리기를 촉구하고 있다. 교회 내외적인 복음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오늘날, 교회의 선교 정책은 다른 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생활 현장 중심의 복음화 대책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곧 시작해야 할 과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목, 1992년 12월호, 이창훈(평화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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