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이경언 바오로: 영웅적인 순결과 청빈의 덕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5 ㅣ No.1376

김길수 교수의 복자들의 영성 (2) 이경언 바오로 - 영웅적인 순결과 청빈의 덕


피조물을 위해 조물주를 배반할 수 없다. 온몸이 입술로 변한들 어떻게 주님의 찬미를 다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경언 바오로(1790~1827)는 이윤하의 차남이며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생질입니다. 그리고 동정부부 순교로 유명한 이순이(누갈다)의 남동생이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자 이경도의 동생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자 생활을 하며 교육을 받았으나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고, 신유박해 때 형과 누나가 순교한 뒤 집안이 완전히 파산하였습니다.

홀로 된 어머니와 형수와 셋이서 서울에서 몹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성서를 필사하고 성화를 그려 교우들에게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해 가다가 중인 가문에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매우 성격이 고약해 일생 동안 아내와 사이에서 수많은 풍파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시련을 모범적인 인내로 참아 견뎌냈습니다.

그러던 1815년에 어머니와 형수를 충청도 연풍으로 낙향시키고 그는 서울에서 아내의 성화와 가난 속에 살면서도 밤낮으로 교우들을 가르치고 외교인의 전교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늘 명랑하고 평화로운 얼굴을 보였으며 끊임없이 성경읽기에 열중하며 교우들 집을 순방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이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이토록 곤궁한 형편에서도 북경으로 한국교회가 파견하는 밀사들의 여비를 마련하는 일에 가장 많은 힘을 쓴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경언 바오로는 항상 스스로 성찰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혹시라도 자신의 언행이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제발 일러 달라.”고 부탁하는 데 그의 마음은 참으로 진지하였습니다.

그가 그의 벗 현석문 가롤로에게 보낸 편지 중에 “우리의 우의는 보통 우정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네. 자네가 아니었더라면 내 결점을 들어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걸세.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보배였던지 참으로 알 수 있게 되네.” 하며 자신의 결점을 지적해 주는 벗을 귀하게 여기며 감사하고 보배로 생각하며 자신을 진지하게 수련해 나갔습니다.

그가 기도나 묵상에 잠기면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를 만큼 몰두하였으며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어 대하니 누구나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간절한 권고를 듣고는 모른 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때 북경의 주교께서 남녀 회장 몇 사람을 선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장들을 양성하는 데 전력 매진하여 매월 첫째 주일에 대상자들을 집에 불러 모아 그들에게 묵상 자료를 주며 참된 신심을 가지도록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이경언 바오로의 성덕과 영성을 알아볼 만한 일화가 있습니다. 몹쓸 아내의 성화와 지극한 곤궁 속에 살고 있던 한여름 막바지 어느 날 한 노파가 이경언 바오로의 집으로 찾아와 무슨 서장으로 보이는 두루마리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돈 많은 젊은 과부가 자기의 소원을 말하며 이경언에게 첩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하는 편지였습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양반은 첩실을 둘 수 있었고 이경언은 왕손의 후예로 몹시 가난하고 또 아내로 인해 불행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은 크나큰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매파를 사정없이 내쫓았습니다. 매파가 실망하지 않고 다시 찾아오자 이경언은 매섭게 책망하며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노파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찾아왔습니다. 그때까지 이경언 바오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어쩌면 그 불쌍한 젊은 과부에게 신앙을 갖도록 가르쳐 입교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파의 말을 듣는 척 하고 늙은 하인을 따라갔습니다. 우선 노파의 집으로 갔는데 이 노파가 그 젊은 과부의 유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밤이 되자 노파는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어떤 집으로 안내하더니 깊숙한 곳 안채에 있는 방으로 데려다 놓고 물러갔습니다. 조금 뒤에 과부는 예의 바르게 소복을 차려 입고 등잔을 밝혀 들고 들어와 이경언 바오로와 마주 앉았습니다. 이경언은 평온한 마음으로 차분하고 진지하게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해 갔습니다. 처음부터 교리 이야기만 한 그는 다음날에도 구원의 신비에 관한 교리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젊은 부자인 과부는 유모를 시켜 값진 물건들을 여러 차례 이경언 바오로에게 보냈는데 그는 받기를 거절하여 유모의 집에 두라고 했습니다. 이경언 바오로의 깨끗한 열정은 과부에게도 전해져 그녀가 주요 기도문을 배우며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과부가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연락을 받은 이경언은 시간을 틈타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교리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하고 대세를 주었는데 과부는 사흘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이경언 바오로는 늙은 유모에게 그 집에 그동안 보관했던 값진 물건들을 돌려보내라고 하니 노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경언 바오로는 그 물건들을 모두 팔아서 그간 과부에게서 꾸어 썼던 돈을 갚는 것이라는 핑계로 물건값을 모두 과부의 상속인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의 영웅적인 순결과 청빈의 덕은 빛났습니다.

그는 늘 마음속에 순교하고자 하는 원의를 품고 있어 즐겨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천주교가 퍼지게 하려면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러던 그는 1827년 전라 지역에서 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가 필사한 교리책과 성경, 그가 그린 상본이 발각되어 전라 감영에서 파견한 포졸들에 의해 그해 4월 21일 서울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관헌들 앞에 선 그는 형님과 누님의 영광스러운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 그들처럼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여 모든 신앙인들에게 찬탄을 받을 만한 모범을 남겼습니다. 그는 1827년 4월 28일 전라 감영으로 압송된 후 6월 27일 옥고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36세의 나이로 옥사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옥중생활을 하면서 포졸의 감시를 피해 가며 틈틈이 쓴 옥중수기를 남겼는데 그 필사본이 1965년 한 순교자의 집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누갈다 초남이 일기 남매’라는 제목의 이 사본에는 이경언의 형 이경도와 누이 이순이 누갈다의 편지와 함께 이경언 자신의 옥중수기가 ‘정해년 이 바오로 일기’란 표제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도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와 다른 식구들에게’ 5월 14일자로 보낸 편지, 그 이튿날인 5월 15일자로 아내에게 따로 쓴 편지 ‘정희의 어머니에게’, 명도회 회원이었던 그가 회장과 회원들에게 보내는 옥중편지도 남겨 교회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옥고와 심문에 응답한 것을 자신의 옥중수기에서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 그런데 도무지 예기치 않고 있던 4월 21일 초저녁에 김성집과 서울 및 지방 포졸 10여 명이 나타나 나를 붙잡아 포청으로 연행하였습니다. … 이리하여 우리는 해질 무렵에 한강을 건넜습니다. 나는 붙잡힐 때부터 천 가지 근심 걱정에 시달려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기진맥진하였습니다. … 이 길을 떠나면서 나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가셨는데 내가 왜 이 길을 걷기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나는 예수를 한발 한발 따라가겠다. 이렇게 결심하니 기운이 솟아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감사 앞에 불려 나갔습니다. 감사는 영장을 옆에 거느리고 앉아 내게 몇 마디 물어 보았고 나는 또 그 전날과 마찬가지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차림새가 진영보다는 십 배나 더 무서워 보였습니다.

“그래 너는 천주교를 버리지 않기로 작정했단 말이냐?”
“버릴 수 없습니다.”

“네가 천주를 보았느냐?”
“안 보고서는 믿을 수 없습니까? 사또께서는 이 감영을 지은 일꾼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오관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소리와 빛깔과 냄새와 맛 같은 것밖에는 모르고 원리나 이치나 비물질적인 것은 모두 정신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는 “네가 배운 것을 모두 말해 보아라.” 그는 옥중에서 교리 설명을 관헌에게 공개적으로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주님 승리는 오묘할 따름입니다. 그는 계속 적고 있습니다.

그 이튿날 전주 고산 곡성 동복 그리고 정읍 관장들이 죽 둘러 앉아 … 그러니까 한 관장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모친이 살아 계시고 처자도 있다는 데 지금이라도 한 마디만 하면 여기서 풀려나가 너의 모친과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니 오죽 기쁜 일이겠느냐?”

“어머니를 다시 만나서 살려면 배교하란 말이지요. 그러나 천주님은 만인의 대왕이시고 아버지시라 제 어머니도 그분에게 조성함을 받으셨으니 어찌 피조물을 위해 조물주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다시 옥으로 끌려 왔습니다.

그가 끝내 배교를 거절하고 교리를 설명하자 형벌이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직접 당한 바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더 묻지 않고 형틀에 올렸습니다. 아아! 나는 도무지 열정도 없고 체질도 약합니다 그러나 비상한 특은으로 이 형틀 위에 놓여 있는 동안 구세주의 매 맞으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20여 차례 매를 맞고 나서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 지는 것을 깨닫고 나는 천주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였습니다.”

“두 사람에게 부축을 받으며 걸어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구경하던 사람 가운데 친절하게 생긴 젊은이가 나를 업고 간수장은 나의 머리를 받쳐들고 하여 감방까지 왔습니다. 눈을 뜨니 다리가 온통 해어지고 사방에서 피가 흐르거나 혹은 상처 위에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아! 나보다 더 튼튼하지도 아니하셨을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셨습니다. 잠이 깨었을 때에는 다리가 더 가볍고 훨씬 덜 아팠습니다. 한 젊은 교우가 내 옆에서 모든 심부름을 해주고 쉬지 않고 보살펴 주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닙니까?”

“예수님께는 도와주는 교우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죄인에게는 이렇게 동정과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고 정신을 들게 하느라고 애들을 쓰는군요.”

“이건 참 과분한 일입니다 모든 특은이 나 한 사람 위에만 무더기로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나의 온몸이 입술로 변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천주의 찬미를 넉넉히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분이 오호라! 이런 분이 지금 복자로 시복되고 있습니다.

[평신도, 제44호(2014년 여름), 김길수 사도요한(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1,35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