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새로운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 첫 선교사제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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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13 ㅣ No.1384

[새로운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1) 첫 선교사제 주문모 신부의 사목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첫 선교사제인 주문모 신부는 1794년 입국해 1801년 순교하기까지 크고 작은 감동적인 일들을 남기신 분입니다. 주문모 신부는 중국 소주(蘇州)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양 학문을 공부하다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20세에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상처(喪妻)한 후, 인생과 진리의 깊이를 깨닫고 그 후 북경 신학교에 입학하여 40세 경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구베아 주교는 서품받은지 얼마 안 되는 (조선 사람과 외모가 비슷한)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합니다. 당시 조선교회의 지도자들은 가(假)성직자단의 부당성을 깨닫고 성사 집전과 교회 유지를 위해 성직자를 파견해 줄 것을 북경 교회에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주교의 마음을 움직여 조선 교우들의 간절한 요청에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조선에 입국하는데 성공합니다. 입국은 했지만, 박해로 말미암아 조심스럽게 활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서울에 본거지를 두고, 성직 수행을 위해 조선말 공부에 전념하였고, 여러 지도급 신자들을 만나 조선 교회의 사정을 파악해 가며 사목활동을 전개해 갑니다. 이렇게 사목을 차츰 익혀갈 무렵, 신입 교우(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집니다. 신자들의 도움으로 주문모 신부는 겨우 피신하였지만, 대신 최인길·윤유일·지황이 체포되어 장살(杖殺)을 당합니다. 주문모 신부는 거처를 옮겨 교우 집에서 며칠씩 피신하면서도 여러 지방(경기 양근, 충청 연산 등)에서 사목을 계속해 갑니다. 그런 가운데 주문모 신부는 차츰 교회의 여러 제도와 가르침을 정리합니다. 회장제도를 도입하여 정착시키고, 신자 단체(명도회-회장 정약종)를 구성하고, 신자들에게 교리와 성사에 관한 교육을 하면서 전례를 활성화하며, 박해 중에 신자들이 성직자를 어떻게 도와주고 함께 해야 하는지 지혜롭게 가르쳐줍니다.

전승에 의하면, 서울 ‘창골’이라는 마을에 화재가 발생해 거의 24시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에 가슴 아파하던 주문모 신부가 송(宋)씨라는 사람에게 성수(聖水)를 주며 “불 위에 뿌리라”하고는 그동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문모 신부가 하라는 대로 하자, 바람이 바뀌어 불길을 재만 남은 쪽으로 몰아가 사실상 화재가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선교활동과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황심(黃沈) 등을 파견하여 매년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써 보내며 북경교구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도움을 받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주문모 신부 입국 직전에 약 4천여 명이었던 신자 수는 신부가 순교를 할 당시에는 1만 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속에서 주문모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함께 이루어낸 쾌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014년 3월 16일 사순 제2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새로운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2) 선교지인 조선에서 순교한 첫 사제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할 때까지 늘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포졸들과 숨바꼭질하듯 피해 다니며 성사와 교육, 영적인 지도를 통해 신자 공동체가 활성화되도록 애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문모 신부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박해자들은 주문모 신부를 찾아내기 위해 신자들을 더욱 압박하며 박해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조선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매진하던 신부님도 흔들립니다. 누군가 밀고할 것 같은 불안함, 계속해서 죄어오는 체포망, 약해지는 자신의 건강 등 인간적인 흔들림을 겪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 더 깊은 곳으로 숨을 생각까지도…. 이때 주님께서는 주문모 신부의 마음을 잡아 주십니다. 주문모 신부는 불쌍한 영혼들을 내려놓고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과 박해자들이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모진 박해를 서슴지 않으며 신자들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상황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묵묵히 관아(官衙)를 찾아갑니다. 누구냐고 묻는 포졸에게 “당신네가 사방으로 헛되이 찾고 있는 주문모가 바로 나요”라고 당당히 밝힙니다. 그리고 관장이 조선에 온 목적을 묻자, 신부님은 “나의 목적은 오로지 참된 종교를 설파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 불쌍한 백성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것뿐이오”라고 대답하십니다.

체포된 신부님은 자신을 심문하는 이들 앞에서 위엄있고 신중한 모습으로 성직자가 지녀야 할 품위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조정에서는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기에 어떻게 처벌할까 고민했지만, 천주교가 더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부님을 극악무도하고 흉측한 외국인으로, 허황되게 조선 백성을 속인 교활하고 간사한 자로 선고하고 군법(軍法)에 의하여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사형 집행장(새남터)에서 형리가 결안문을 읽게 하자 신부님은 아주 침착하게 그것을 전부 읽고 소리 높여 군중에게 말합니다. “나는 천주교를 위해 죽습니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한 채 머리를 숙이고는 칼을 받습니다. 그 순간 맑고 청명했던 하늘은 갑자기 구름으로 덮였고, 거센 바람이 일더니 번개가 온 하늘을 가르고 천둥이 울리며 흙이 섞인 비가 억수같이 내려 주위가 물바다로 변했다고 전해집니다. 신부님이 숨을 거두자 폭풍우는 가라앉고 해가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 참혹한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었던 사람들은 오히려 머리를 들어 ‘승리를 축하’하는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닷새 동안 나무 끝에 매달려 있었는데, 매일 밤 무지개 같은 환한 빛이 시신 위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시신은 포졸들이 교우들 모르게 매장하여 그 보배로운 유해는 찾지 못하고, 수원교구 어농성지에 가묘를 조성하여 현양하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6일 사순 제5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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