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충청도의 복자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9 ㅣ No.1381

한국순교자 124위 복자 ⑤ 충청도의 복자들



충청도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죽을 때까지 매질과 굶주림, 그리고 얼려 죽여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원시장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사촌 형 원시보와 함께 입교했다. 1년 동안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한 그는 깨달음을 얻고 집으로 돌아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설명에 힘을 보태  주어 친척과 친구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었지만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여 어떤 일에도 온화함을 잃지 않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했다. 이 때문에 관장의 귀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바로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순교했다.

원시보 야고보는 신해박해 때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피신을 했지만 사촌 동생 원시장의 순교를 듣고 함께 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주문모 신부를 만났지만 첩이 있다는 이유로 성사를 받지 못하자 즉시 첩 을 내보냈다. 2년 후 정사박해가 충청도 전역을 휩쓸었을 때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미 덕산에서 두 다리가 부러졌던 원시보는 모진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6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이도기 바오로는 본래 글을 알지 못했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사용했고 위협 속에서 피신을 다니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그의 나이 54세 때 정해박해가 일어났고 그해 6월 체포되어 정산 관아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새해가 밝았 지만 고문은 계속되어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고 실신하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잃고 버려진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안 포졸들이 잔인하게 짓이겨 죽였다. 사람의 형상을 갖추지 못한 이도기는 1798년 7월 24일 55세로 순교했다.

교우들 사이에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방 프란치스코는 우연히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누구보다 빨리 이 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정산필 회장과 박취득, 원시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했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고 그들처럼 순교하기를 열망했다. 그러던 중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다.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신해박해 때 체포된 교우들을 찾아가 위로하던  중 관장에게 “무고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라고 항의하다가 체포됐다. 이후 해미와 홍주 관아로 이송되어 잔인한 형벌을 당했지만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옥에 갇힌 지 한 달여 만에 석방하라는 명령 때문에 순교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지만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30세의 나이에 새끼줄에 목졸려 순교했다.

정산필 베드로는 성격이 괴팍하고 힘이 비상하여 모두 무서워했지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로 겸손하고 온순 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주 신부가 입국하자 직접 찾아가 세례를 받았고 내포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이 맡은 직분을 다했다.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했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전심을 쏟았다.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 입교한 배관겸 프란치스코는 신해박해 때 체포된 적이 있었지만 배교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죄를 뉘우치고 신앙공동체를 이룩하는 등 하느님을 섬기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정사박해 때 밀고자의 고발로 체포되어 순교했다.

인언민 마르티노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접해 교리를 받은 다음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정사박해 때 공주에서 체포된 그는 스스로 신자임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 원한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했다. 심한 매질과 엄청나게 큰 돌로 가슴을 내리치는 형벌로 턱이 나가고 가 슴뼈가 부러진 가운데 순교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칠 것을 예상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했다. 이틀 후 연산 땅에 나타난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관아로 압송되어 배교를 종용당했지만 거부했다. 그는 장터로 끌려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지만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망나니들이 그를 넘어뜨린 후 몽둥이로 불두덩이를 짓찧어 죽였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 27세로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음에도 미 소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이를 목격한 비신자들이 여러 명 입교했다.

이국승 바오로는 충주지역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후 은총으로 마음이 움직여 즉시 교회의 본분을 지켰다. 그러나 순교에 이를 만큼 신앙이 굳지 않아 1795년 을묘박 해 때 배교했다. 이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그는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옥에 갇혔을 때 배교하려는 신자를 회심시켰다. 그는 1801년 사형판결을 받고 며칠 후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의 아버지 김광옥 안드레아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고 사순시기에는 금식재를 지키며 갖가지 극기행위를 실천했다.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친척 김정득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데 노력했다. 얼마  후 김정득 베드로는 김광옥과 함께 청주로 이송됐다 그들은 서로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견뎠고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광옥은 고향인 예산에서 김정득은 대흥에서 각각 칼날을 받아 순교했다.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며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했다. 신유박해 때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 책 때문에 체포되어 곤장 80대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순교했다.

교우들은 천한 신분 출신인 황일광 시몬을 애덕으로 감싸 주었고 양반들도 그를 똑같이 대했다. 1800년 정약종의 이웃으로 이주한 그는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며 날로  신앙이 깊어져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후 정약종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그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리며 힘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고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하는 기쁨도 얻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체포되어 다리가 으스러지는 모진 형벌에도 밀고하지 않은 그는 홍주로 이송된 즉시 참수됐다.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이며 김종한의 부친인 김진후 비오는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권세와 쾌락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은총의 부르심을 들을 여유가 없었고 특히 관직을 얻자 자식들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그러나 가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마음이 기울어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가며 어른으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신해박해 때 처음 체포되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풀려났다. 이후에도 4~5차례 체포되어 풀려나곤 했다. 또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해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후 해배됐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1805년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어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했지만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었기에 10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는 1814년 75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40세가 지나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오반지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적인 체념으로 가난을 참아 견뎠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 나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하지 않자 사형집행관이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열심과 신덕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진 김원중 스테파노는 병인박해 때 신자 10명과 스스로 체포되 어 진천 관아로 가서 25일 동안 갇혀 있다 공주로 압송되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장 토마스는 1866년 순교한 성 장주기 요셉의 육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을 듣고 입교했다.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에 정착하여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면서 외아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착한 사람으로 불린 그는 병인박해 때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피신하지 않았다. 얼마 후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진천 관아로 압송되어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믿음을 지키며 대자가 배교하려하자 권면시키고 자신 또한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참고문헌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초상 제공 :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한국교회는 지난 8월 16일(토) 거행된 시복식으로 103위 성인에 이어 124위 복자를 맞이했다. 124위 복자들의 빛나는 희생과 굳센 신앙은 오늘도 우리 안에 뜨겁게 살아 숨쉬며 우리를 주님 곁으로 부르고 있다.

[월간빛, 2014년 10월호, 김선자(수산나) 기자]



1,02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