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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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창현 요한: 덕망 높은 총회장, 성서의 첫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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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5 ㅣ No.1377

김길수 교수의 복자들의 영성 (3) 최창현 요한 - 덕망 높은 총회장, 성서의 첫 번역자


‘조용하고 슬기로웠고 견식이 넓고 마음이 용감하고 확고한 사람’

‘천주의 첨례 날에 비단 장막을 치고 천주상을 모셔 놓고 천주의 은혜를 생각했다.’



우리나라에 복음 선포의 선구자이신 광암 이벽 선생께서 먼저 찾아간 사람들이 중인 계급 친구들 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암의 활기차고 박력에 넘치는 기쁜 소식을 듣고 즉시 응답하였는데 그 가운데 최창현(요한 1759-1801)이 들어 있었습니다.

최창현은 한양 초전골의 중인 출신으로 역관 집안의 출신입니다. 그가 살던 초전골에는 물맛이 좋은 큰 샘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우물이 있는 동리에서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을 지닌 관천이라는 호로 신자들이 불렀습니다.

그는 또 기해박해 때의 순교성인 최창흡(베드로)의 이복형이며, 1795년 을묘박해 순교자 최인길(마티아)과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최필공(토마스)의 인척이기도 합니다. 그는 비록 중인 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며 견문을 넓혔고, 조용한 성품에 매우 슬기로웠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젊은이로 자랐습니다. 그는 광암의 권고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던 해인 1784년 겨울에 입교한 후 한결같은 신앙생활로 당대에 가장 존경받는 총회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한국 초대교회 최고 평신도로 정약종을 한없이 칭찬하여 소개하면서도 “그의 덕망은 관천에 미치지는 못했지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최창현의 덕망은 모든 이가 우러러 볼 만하였습니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 32행과 33행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총회장 최요한 창현은 중인입니다. 을묘년에 순교한 최미지아(최인길 회장을 말함)의 족질인데 그의 집안에는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평화롭게 몸을 삼가고 공명하게 힘쓰기를 20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옳았으며, 누가 혹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만 한 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일도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다시 몇 마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으며 소리의 강론은 자세하고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으므로, 비록 예사로 말하고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 듣고 싫증이 나지 않아 사람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에게 신령스러운 이익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의 천명에 순종하고 남에게 겸손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왔으며 남보다 뛰어나게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책망 받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에 있었으므로 호를 관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조화진(배교한 밀고자)이 충청도를 염탐하여 최요한이 교인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하지 못했는데, 이에 이르러 최요한은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알고 교우의 집에 피해 있다가 신유년(1801년) 정월 초닷샛날 몸이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 몸을 조리하는데,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여삼(밀고자)이 포도대장을 인도하여 와서는 덮쳐 체포하여 포청에 가두었습니다. 십여 일 후에 치도곤 열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려 마치 죽은 사람 같더니, 매질이 끝나고 관리가 죄목을 세자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십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 관리가 “네가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고 물으니까 그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잘 때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 하고 되물으니, 관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뒤에 아무런 소식을 못 듣다가, 정 아우구스티노(약종)와 같은 날에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43세였습니다.

백서에 적혀 있듯이 존경 받던 총회장 최창현 요한은 이승훈(베드로), 최필공(토마스),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홍낙민(루카),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함께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가을에 단 한 분의 선교사 없이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을 중심으로 교단은 조직이 되었으나, 그 교회는 성직자도 없고 미사성제도 거행하지 못하는 목자 없는 교회였습니다. 자발적 수용에 의해 얻은 열의에 찬 천주신앙의 실천으로 신품성사에 대한 교리를 미처 알지 못하고 평신도가 스스로 사제의 역할을 하는 임시 준 성직자단을 이루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 최창현도 그 신앙심과 탁월한 인품이 높이 평가되어 신부로 선임되어 그 임시 성직자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북경의 주교로부터 알게 되자 평신도에 의한 임시 성직자단을 해체하고 사제영입운동을 시작합니다.

1794년 초에 주문모 신부님 입국이 이루어지자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충직하게 도왔습니다. 그는 주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를 받았으며, 언제나 미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헌신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그의 덕망이 높고 그를 사랑하여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를 총회장에 임명하여 신도들을 이끌도록 했습니다. 그는 비록 중인이었지만 양반들도 그의 지도를 받아들였습니다. “조용하고 슬기로웠고 견식이 넓고 마음이 용감하고 확고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던 그는 “당시의 교우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던 총회장이었다.”고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적고 있습니다.

한국사람으로서 복음서를 맨 처음 읽은 사람은 문헌상으로 광암 이벽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한글로 처음 번역한 사람은 최창현(요한)입니다. 그는 한자로 된 복음서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발췌해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성경직해’를 내놨습니다.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한글로 번역한 것인데 위 두 권의 책 중에서 당시 한국의 교회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택해서 한 권으로 편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글본 ‘성경직해’를 한때 ‘성경 광익 직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글본 성경직해에는 86개에 달하는 연중주일과 축일의 복음 구절이 한글로 번역돼 수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경직해는 성서의 전체적인 번역은 아닙니다. 한자로 된 발췌본인 중국의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처럼 주일과 축일에 해당하는 성서만 번역되어 실려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한글본 성경직해에 실려 있는 복음서의 분량은 4복음서 전체의 구절 총 3,709절 중 30,68%에 해당하는 1,138절입니다.

초대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이 한글본 성경직해를 통해 우리말 성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관천이란 호로 더 잘 알려진 창현이라고 불리는 최 요한도 역관 집안의 아들로서 천주교에 나온 후로 모든 교회 서적들을 자기 손으로 베끼고, 그것으로 크게 봉사하였다. 그의 책 베끼는 솜씨가 어떻게나 평판이 높았던지 책을 가지고 싶은 교우들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그를 찾아갈 정도였다. ‘주일과 축일 성경의 해석’이라는 한문책을 조선말로 번역한 사람이 그였다.”고 전한다.

최창현(요한)이 번역한 성경직해는 손으로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초창기 일반신자 사이에 널리 읽혔습니다. 그가 번역한 필사본이 널리 읽혀졌다는 사실은 1801년 박해 때 이름 없는 한 여교우의 집에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 중에 이 책이 나오고 있음을 ‘사학징의’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4복음서의 체계적 번역서를 갖게 된 것은 한기근(바오로) 신부에 의해 번역되어 1910년에 출간된 ‘사사성경’입니다. 그러나 총회장이며 순교복자인 최창현(요한)에 의해 번역된 성경직해는 사사성경 출간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널리 읽혔습니다.

1801년의 이 추안급국안에는 최창현이 최초의 한국교단의 모습에 대하여 “천주의 첨례 날에 비단 장막을 치고 천주상을 모셔 놓고 천주의 은혜를 생각했다.”고 공술하였습니다.

혹독한 형벌 속에 목숨이 경각에 이른 찰라에도 그의 신앙은 요지부동으로 그가 평소에 철석같이 굳게 다져진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최창현 요한은 총회장답게 “자신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지도적 교인답게 야수와 같은 형리들 앞에 천주의 신앙을 증거하여 영생의 길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광으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2014년 8월 16일 그 옛날 형고의 피가 어렸던 지금의 광화문 앞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의 집전으로 백만 군중과 함께 민족과 역사 앞에 복자로 선포되셨습니다.

[평신도, 제45호(2014년 가을), 김길수 사도요한(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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