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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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 부자: 관장도 감복한 지극한 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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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4 ㅣ No.1375

김길수 교수의 복자들의 영성 (1) 관장도 감복한 지극한 효성


박경화 바오로(1757-1827)와 박사의 안드레아(1792-1839년) 부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이며 역사가인 클로드 달레 신부님(1829~1878)은 그의 불후의 명저 ‘한국천주교회사’ 서문에서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까닭을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국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망각되지 않도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언젠가는 우리의 제단 위에 모셔질 그분들을 잊히게 버려두어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한 대로 103위 한국순교 성인들은 시성되어 지금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제단 위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의 종 순교자 124위의 시복에 즈음하여 깊이 그의 은혜로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레 신부님은 방대한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하시면서 조금도 지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말했습니다. “사형집행인들이 지치지 않고 고문했고, 천주교인들이 지치지 않고 죽었으며, 하느님은 순교자들에게 지치지 않는 힘과 끈기를 주셨으니 어찌 내가 그분들 승리의 이야기를 쓰는데 지치겠는가!” 그렇습니다. 이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남은 영광스런 과제는 그 승리의 삶을 본받아 사는 데에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후예입니다. 순교선열들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성찰해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도록 우리 이야기를 펼쳐 보고자 합니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부자지간이면서 함께 옥고를 치르고 아버지 박경화 바오로는 옥사로, 아들은 참수로 부자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관명을 ‘도항’이라고 하는 박경화는 충청도 홍주지방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 재산도 넉넉했으며, 고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33세 때 천주교에 입교했으나 1794년 박해 때 아직 예비신자로 배교한다고 말하고 석방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신자로서의 본분을 더욱 열성으로 지켜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향에서는 천주님을 섬기는 데에 여러 가지 세속적 사정으로 지장을 받게 됨을 걱정하다가 그 재산과 일가친척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 신앙생활을 더욱 자유롭게 할 곳을 찾아 충청도 단양의 산골로 숨어들었습니다.

이때 그는 그의 아들 사의 안드레아를 데리고 가서 자기의 태생을 숨기고 그곳 주인 행세를 하며 세속의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 기도에 열중하며 영혼을 구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문모 신부님이 입국하시자 신부님을 찾아가 성세성사를 받고 그날부터는 온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윽한 곳을 찾아 정한 시간에 기도와 묵상에 몰두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성서를 읽고 교리를 공부하여 신앙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넓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참으로 자기를 잊어버리는 사람이라고 하며 그의 말을 경청하게 되고 그의 진실하고도 정성이 깃든 이웃사랑의 모범 때문에 그의 말에는 더욱 설득력이 커서 그의 집에 드나드는 이들이 늘어갔습니다. 이 무렵 그는 특히 자녀의 종교교육에 철저하여 아들 사의 안드레아는 복된 가르침을 받았으며 차츰 효성이 지극한 자녀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827년 전라도에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자 그는 주님의 섭리에 의지하고 염려하지 말라고 교우들을 격려하고 스스로 순교의 열망을 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무렵 그는 중한 병이 들어 앓게 되어 효성 지극한 아들이 정성어린 간호를 했는데 그때 아버지 박경화는 아들 사의와 식구들에게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 앞에서 앓을 터이니.” 하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훗날 그가 순교하자 사람들은 이 말이 순교를 열망하여 결코 식구들 앞에서 병들어 죽지는 않으리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알게 되면서 더욱 그를 추모하였습니다. 1827년 4월 그믐 예수 승천축일을 맞아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축일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밀고자가 데리고 온 포졸들에게 부자가 함께 체포됐습니다.

박경화는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이 되풀이되고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낀 그는 “이제 내 육신은 관장의 손에 맡기고 영혼은 천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형리들은 그의 뺨을 치고 수염을 뽑고 온갖 모욕과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박경화 바오로는 “이 고통은 주님의 은혜이니 천주께 감사한다.”고 하며 놀라운 인내로 그 고통과 모욕을 이겨냈습니다. 관장은 결코 굽힘이 없는 노령의 이 증거자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괴롭혔습니다. 노령에다 여러 차례 고문으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그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 옥중에서 아들과 교우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했습니다. “이 옥을 복락소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가족들로 인해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박경화 바오로가 지극히 평온한 기색으로 옥사 순교하니 1827년 11월 15일로 그의 나이 70세 때였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체포당해 감옥에 온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는 그토록 덕을 갖춘 아버지의 모범에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 속에 자랐습니다. 나이가 차면서 신앙과 열성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효성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일상생활에 규율이 있었고 모든 이에게 친절하고 관대하였지만 효성이 특히 지극했습니다. 부모가 병이 들면 그 곁을 떠나지 않았고 또 부모가 먼저 식사를 한 뒤가 아니면 먹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아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먼저 음식을 들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박경화는 술을 즐기는 편이어서 절대로 과음을 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마시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사의 안드레아는 살림살이가 어려웠지만 아버지가 즐기는 술을 반주로 드시도록 하는 데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 이러한 작은 기쁨이나 만족을 드리기 위해서 그는 더 많은 일을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엄격히 절제하면서도 기뻐하였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그저 지나가는 말로 “우리 집이 너무 협소하단다. 필요한 때에 몇 명의 교우들을 거두어 주기 위해서라도 방이 2~3개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아들인 사의는 그대로 명령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매일 일과를 평소처럼 하면서 외출할 때마다 어김없이 들보나 섯가래감을 1~2개씩 모아서 오래지 않아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방 몇 칸을 늘려 놓았습니다. 주위의 신자들이 이 복된 집을 찾아 모여들고 또 아버지 박경화는 가난하면서도 찾아온 손님들을 예의에 벗어나지 않게 대접하기를 바라기에 아들 사의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더욱 근검절약하여 손님 접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해냈습니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열절하게 실천하던 그는 아버지와 함께 체포당하여 늙으신 아버지가 보여준 모범을 따라 그도 뛰어난 인내와 용기로 형벌을 견뎌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상주진영에서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법에는 부자를 같은 감옥에서 동시에 옥살이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사의 안드레아는 아버지가 문초와 형벌로 몹시 쇠약해진 것을 보고 잠시라도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지를 보살펴 드리면서 관장에게 간절히 호소하여 아버지와 함께 지내도록 청원했는데 관장은 아들의 효성에 감복하여 “국법에 금하는 바이나 너의 청이 옳고 타당하니 그 지극한 효성을 보아 허락한다.”고 했습니다. 부자는 함께 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함께 하였습니다. 사의 안드레아는 형벌을 받고난 후에 스스로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데 아버지께 다가가서 목에 채워진 무거운 칼을 쳐들어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드리니 옥중의 모든 사람들은 이 광경에 깊이 감명하여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 그토록 효성스러웠던 것과 같이 하느님께도 지극히 충실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흠숭은 그의 지극한 효성이 승화돼 완성으로 나타나는 초성적 덕행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옥살이를 하면서도 그의 효성과 동료 신자들에 대한 배려는 한결 같았습니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옥살이에서 교우들은 그를 보고 위안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박사의 안드레아는 영원한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참혹한 옥살이를 장하게 견뎌내고 기해박해가 일어나서야 정부 조치에 따라 1839년 5월 26일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습니다. 그가 참수형으로 동료와 함께 순교할 때 이들을 바라보는 죄수와 옥졸들은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했는데 이는 오랫동안 옥중에서 보여준 이들의 모범적인 삶 때문이었습니다.

[평신도, 제43호(2014년 봄), 김길수 사도요한(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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