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황일광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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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8 ㅣ No.1368

[124위 시복 특집] 황일광 시몬(1757-1802)


“황일광 시몬은 백정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 계급이 조선에서는 어떻게나 멸시를 당하는지, 거기 속한 사람들은 종들보다도 더 낮게 다뤄지는 지경이다. 그들은 인류 밖에 있는, 품위를 잃은 존재로 다뤄진다.” - 달레 「교회사」 중에서 -



충청도 홍주, 백정의 아들 황일광 시몬은 세상의 멸시를 받으며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놀랄 만한 지능과 열렬한 마음,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습니다. 1792년 황일광은 이존창을 찾아가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로 이주했습니다. 교우들은 그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사랑으로 감싸 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황일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0년 황일광은 정약종이 살던 경기도 광주로 이주하여 황사영, 김한빈 등 여러 교우들과 친밀하게 교류했습니다. 이제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져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약종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황일광도 동생과 함께 한양 정동의 주막집 행랑채로 옮겨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힘닿는 대로 교회 일을 돕는 가운데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하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신유박해 때 황일광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포졸들에게 명료한 어조로 말하였습니다. “나리들께서 저를 남원 고을에서 살기 좋은 옥천 고을로 옮겨 주시니,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남원’은 ‘나무’를, 옥천의 ‘옥’은 ‘감옥’을 의미하는 것으로, 황일광은 감옥으로 끌려가는 순간조차 특유의 재기를 발휘하며 신앙에서 비롯된 곤경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포도청과 형조의 문초와 형벌에도 황일광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자유롭게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관리들은 비천한 신분의 황일광이 자신들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회유마저 거부하자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아 견딘 그는, 형관의 추상같은 호령에도 굴복하지 않고 천주교를 ‘성스러운 학문’(聖學)이라면서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다리 하나가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를 맞고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황일광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면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았지만, 혹여 유혹이 일까 두려운 마음에 아내와 아들만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802년 1월 30일 홍주에 도착한 황일광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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