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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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김사집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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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6 ㅣ No.1366

[124위 시복 특집] 김사집 프란치스코(1744~1802)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



‘성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 출신으로, 과거를 준비 하던 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만 노력하였으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습니다.

김사집의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은 복음 전파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 책들이 압수되면서 이내 김사집의 이름이 관청에 보고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그는 관장에게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관장은 배교할 의사만 있으면 이내 놓아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김사집은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는 제가 어떻게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관장이 그에게 죄수들을 매질하는 천한 임무를 맡겼지만, 이것마저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김사집은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하고 당부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김사집은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2개월 뒤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청주 병영에 이송되었습니다. 엄동설한에 해미에서 청주로 가는 3일간의 180리 길은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지만 그는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청주로 이송되고 얼마 안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는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때가 1802년 1월 25일로, 당시 그의 나이 58세였습니다. 목격한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사집은 신 · 망 · 애 삼덕(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했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고 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9월 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연중 제23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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