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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나국재 카누토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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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나국재 카누토 신부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그의 생애에 대하여는 그가 쓴 서신들을 통하여 추정할 뿐이다. 그는 펠트키르히(Feldkirch)에 있는 스텔라 마투티나(Stella Matutina, 새벽별 - 성모님의 별칭) 김나지움에서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하다가 1906년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티롤지방에서 소위로 군복무를 했다. 1911년 3월 22일에 그가 쓴 한 편지에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입회허락을 받았으며, 펠트기르히에서 피정을 마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몇 주간의 청원기를 거쳐 카누토라는 수도명으로 수련기를 시작하고 1912년 7월 28일 첫서원을 발했다. 딜링엔 신학원과 뮌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그는 1914년 8월 13일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종신서원을 하기도 전에 사제품을 받고 군종신부로 참전했다. 그는 이듬해 8월 27일에 종신서원을 발했다. 1921년 1월 16일 카누토 신부는 한국으로 선교 파견되었다. 그의 동생 레오폴드(Leopold Graf des Enffans d'Avernas, 羅碧宰, 1887-1944) 신부는 1913년부터 서울 백동 수도원에 파견되어 살고 있었다.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카누토 신부는 5월경 북간도 삼원봉(三元峰) 본당에 제3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당시 함경도와 북간도 지역을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인수받은 백동 수도원에 사제수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원산 본당 보좌신부로 발령이 났다. 원산에서 2년 동안 전교 활동을 한 그는 1923년 8월 내평(內坪) 본당으로 부임하여 임시 주임을 맡다가 곧 제10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내평에서 그는 꼬박 11년간을 사목했다. 내평 본당은 1887년 설립된 안변 본당의 후신이다. 본당은 1896년 2월 내평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경원선 철도가 개통된 이래 내평보다는 신고산역 지역이 발전하게 되었고, 따라서 전교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그는 신고산역 인근에 있던 가옥들을 매입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한 뒤 1930년 초반에 본당을 이전했다. 이때부터 이 본당은 ‘고산(高山)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심장과 신장에 큰 무리가 와서 사목활동을 하기가 어려워진 그는 1934년 7월경 고산을 떠났다. 그는 원산 본당에 머물며 진료를 받았고,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원산 수녀원에 가서 미사를 드려주었다. 그 해 12월 초 그는 요양을 위해 필리핀의 산 베니토(San Benito) 수도원으로 떠났다가 원기를 회복하고 1935년 10월 5일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9년 동안 원산 수녀원에서 수녀들의 영성생활을 지도하다가 1943년 6월 13일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 자료출처 -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원산수녀원사(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1988년) [분도, 2010년 여름호] 0 1,03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