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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교리: 생존을 위한 사람? 사치인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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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914

[간추린 사회교리] 생존을 위한 사람? 사치인 인권?

 

 

사람이 무엇일까?

 

‘사람이 무엇일까?’ 또는 ‘나는 누구일까?’라고 한 번이라도 물어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인류가 존재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이 물음은 계속될 것이다. 저마다 다르고, 그리고 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 물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만이 이 물음에 답을 찾으려 매달리는지도 모른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 답이 불변의 무엇이 아니라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가 안다. 삶이 만사형통일 때 답이 다르고, 삶이 고달플 때 떠오른 답이 다르다. 주변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답이 떠오를 때가 있고, 때로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 속에서 답을 찾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의 별과 산천초목의 변화 속에서 답을 찾기도 한다.

 

‘사람이 무엇일까?’ 또는 ‘나는 누구일까?’ 하는 이 물음은 그러니까 답이 있되 아직 그리고 언제나 미완성의 답으로 내게 떠오른다. 내가 답을 찾는다기보다는 그 답이 내게 다가오고, 그러다가 희미해지고, 또 그러다가 다른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정말 오랫동안 사람의 피부색, 종교, 문화, 성별, 사회적 신분 따위의 것에서 그 답을 찾으려 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역사와 이성은 잘 보여준다. 그래도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그 답을 찾아 나선다.

 

‘사람’에 대해 재미있는 설명이 있다. 우리말에서 ‘사람’이란 ‘살다’의 이름씨인 ‘삶’과 ‘알다’의 이름씨인 ‘앎’이 결합되어 만든 말이라는 설명이 그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사람이란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존재라고 파악한 셈이다. 새삼 우리 선조들의 이름 붙임의 지혜로움에 감탄한다.

 

그리고 원시사회건 농경사회건 그리고 오늘의 산업사회 또는 현대사회 포스트모던 사회건, 삶이 관계 맺기임은 변함없다. 관계의 모양이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를 뿐 그 본질은 변함없다. 이를 묶어보면, 사람이란 관계맺기의 올바른 길을 아는 존재라 해도 될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성경도 이 ‘사람’을 설명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첫 사람을 하느님께서 만드셨다고 전한다.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으로 흔히 이해하지만, 다른 한편 하느님을 닮았기에 하느님의 상대가 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느님하고 관계를 맺으며 말하고 일하고 부대끼는 존재로서의 사람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은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돌보고 공존하며 관계를 맺는 존재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와 닮은 또 다른 사람(하와)과 엮임으로써 그 처음부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이를 흔히 사회적 존재라 부른다. 이렇게 사람(아담)은 하느님(창조주)과 관계, 세상(모든 피조물)과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하와)과 관계를 올바르게 맺는 것을 아는 존재가 된다.

 

창세기의 다른 부분은 이 관계를 훼손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풀어간다.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비틀어졌을 때 세상에서 소외되고(실낙원),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 사이의 분열(바벨탑)이 발생함으로써 조화를 잃어버리고 대신 어지러움과 혼돈과 고통에 빠진다.

 

왜 사람은 본래의 이 올바른 관계를 어지럽힐까? 창세기는 두 가지를 이유로 꼽는다. 하나는 인간 상황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충동이며, 다른 하나는 공동체(세상) 안에서 자신을 떼어내어 모든 대상을 타자화(他者化) 하려는 자율성에의 유혹이다. ‘따로 또 같이’의 사람이 ‘따로 또는 같이’의 양자택일의 길을 가려 할 때 올바른 관계는 엉클어지는 셈이다.

 

창세기의 사람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확장된다. 곧 하느님께서 엉클어진 관계의 결과(조화의 파괴)를 회복하려고 끊임없이 역사와 공동체에 개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성령이 사람 안에 머무름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사람, 하느님과 인류 공동체, 하느님과 역사는 질서회복의 여정을 걷는다.

 

이제 사람의 존엄함의 근거를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은 그가 누구건, 피부색, 인종, 성, 종교, 국적, 그런 후천적인 것과 관계없이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과 동행하는 존재다. 이것이 신학적 관점에서 존엄함의 근거이다.

 

하지만 철학적 또는 인간학적 관점에서 존엄함의 근거는 조금 다르다. 사람에게는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능력이 있는데, 우선 사물의 이치와 진리를 찾아 나설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의 능력,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양심의 능력, 그리고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능력이 그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신학적으로도, 인간학적 또는 철학적으로도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 더 나아가 귀한 존재, 존엄한 존재다. 귀한 존재이므로 귀하게 대해야 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사람의 존엄함과 인권 - 인권의 질식

 

사람의 이 존엄함에서 우리가 쉽게 말하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존엄함을 훼손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하느님과 예수와 성령을 거스르는 도전이며, 인간학적 또는 철학적으로는 인간다움(이성, 양심, 자유의지)을 부정하는 자기 파괴 행위이다.

 

역사는 바로 이 인간의 존엄함과 그 존엄함에서 흘러나오는 인권을 회복하려는(또는 지키려는) 투쟁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권의 영역 가운데 구체적으로 처음 등장한 영역은 ‘정치적 권리’ 또는 ‘시민적 권리’를 꼽을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참정권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불과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공동체를 우리가 스스로 가꾸지 못했다. 일본제국은 국권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삶을 결정할 자유마저 강탈했다. 그들(남)이 우리(나의) 삶의 주인 행세를 한 셈이다. 남의 얘기 같지만 우리의 과거 역사에 양반이 존재했던 그 시절, 대부분의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하고 책임질 수 없는 ‘노예’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린다. 이를 흔히 인권의 한 영역, 곧 ‘정치적 권리’ 또는 ‘시민적 권리’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정치 시민적 권리가 온전하게 실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인권은 언제나 그 반대 세력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있었던 선거관리위원회의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 사건은 우리가 마땅히 행사해야 할 이 정치 시민적 권리(자유 권리와 민주 권리)를 훼손하려는 반인권행위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다음에 발전한 인권의 영역은 아무래도 경제, 사회적 권리의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기에 원하는 일을 하고, 그로써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꾸려간다. 이를 경제적 권리라 한다면, 교육과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 권리 영역에 해당할 것이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이 경제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앞의 경우처럼 이 역시 완성된 것은 아니며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 특히 오늘날 이 영역의 인권은 심각한 수준으로 퇴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실업은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었으며,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50%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있다. 교육과 문화생활의 불평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최근에야 등장한 복지권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 환경에서 복지 포퓰리즘 논란으로 간단하게 희석되는 수준에서 복지를 권리로 내세우기에는 난망한 실정이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는 차치하고 지난해 발생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라든가, 70억의 지구인 가운데 10억의 나와 같은 다른 사람이 굶주리고 굶어죽는 현실 같은 환경 문제나 빈곤 문제는 이 문제를 전 지구인이 연대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는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자각에서 최근 ‘연대의 권리’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그러나 핵발전소를 더 건설하고 수출하고, 자유무역으로 세계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우리 위정자들의 태도에서, 그리고 주류(?) 언론의 무차별 여론 형성에 휘둘리는 실정에서 세계인(지구인)으로서의 연대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에게 연대권은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인권은 공기와 같아서 그것이 없을 때 그 소중함을 안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공기 같은 것이 굳이 필요한가? 돈 많이 벌어서 사다 들이마시면 되지!’ 한다. 우리들에게 생활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인 줄 알라고 윽박지른다. 아주 교묘하게.

 

우리에게 인권은 사치인가?

 

* 박동호 안드레아 - 서울대교구 신부. 지금 신정동본당 주임으로 교구 정의평화위원장과 천주교인권위원회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2월호, 박동호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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