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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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이일언 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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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03 ㅣ No.1410

[124위 시복 특집] 이일언 욥(1767-1839년)


“긴 세월을 옥에서 보내고 오늘에야 비로소 내게 천당 가는 길이 열렸는데 이런 경사를 맞아서 왜 우는 것이냐? 비통해 하지 말고 꼭 이 아비가 걸어온 길을 따라오도록 하여라.”



충청도 홍주 출신 이일언 욥은 어려서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귀양을 갔는데, 그곳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물도 얻어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10년을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으나, 묵묵히 참고 따름으로써 참다운 신자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개인 집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된 이일언은 유배지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고, 1826년 5월에는 연금에서 풀려나 전라도 임실의 대판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교리를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이듬해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피신을 권하는 아내에게 도리어 그는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해 죽겠소.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궁벽한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조차 없으니 기막힌 일이 아니겠소.” 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전주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는데, 이일언은 자신이 바라던 바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는 아주 밝은 모습으로 그들을 따라나섰습니다. 전주 관장은 첫 문초에서 이일언의 전력을 알아내고는 잔혹한 방식으로 매질했으나, 그는 의연하게 모두 감내했습니다. 키가 작고 외모도 볼품없는 이일언이었지만 굳센 의지로 관원들의 주목을 받았으니, 아전들은 “우리가 외모만 보고 저놈을 잘못 판단했네. 저놈은 일당의 두목 중 한 명인 게야.”라고 수군댔습니다.

문초와 형벌이 며칠 간 계속되었지만 이일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므로, 관장은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그를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이후, 이일언은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집행이 지연되는 것을 두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여기에 남아 있다 한들 아무러면 어떻소? 우리가 여기서 죽기만 한다면야 그 또한 천주를 위한 죽음이 아니겠소?”

이일언은 72세가 되던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으로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형장으로 가는 그의 뒤를 자식들이 울며 따라오자, 이일언은 밝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옥중에서 신음해 오다가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나의 행운을 기뻐하여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너희도 훌륭한 교우가 되거라.”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1월 30일 대림 제1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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