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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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박사의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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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1-18 ㅣ No.1403

[124위 시복 특집] 박사의 안드레아(1792년~1839년)


“우리가 죽을 시간이 임박했으니 무엇보다 죽음을 잘 준비합시다.”



‘사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박사의 안드레아는, 1827년 순교한 복자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사의가 태어날 때 이미 박경화가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므로 박사의는 자연스럽게 신앙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의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주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는데,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박사의와 그의 가족들은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의 재산을 버리고 끊임없이 옮겨 다녔기에 몹시 가난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낮에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저녁에 규칙적으로 가족과 함께 기도를 바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박사의는 가족과 함께 경상도 상주 고을 멍에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 그의 가족은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몇 차례 심문을 받은 박사의는 아버지와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당시 조선의 국법은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장소에서 심문받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박사의는 아버지와 헤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박사의는 늙은 아버지 곁을 잠시라도 떠날 수 없어 재판관에게 제 속내를 고했고, 그의 효심에 감복한 재판관은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때부터 박사의는 항상 아버지와 동시에 문초를 받았는데, 몸을 거의 쓰지 못할 정도로 형벌을 받은 후에도 즉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돌보았습니다. 이토록 눈물겨운 효행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 박사의는 계속되는 형벌과 옥중에서의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그해 11월, 박경화가 70세의 고령으로 옥사하자, 감옥에서 짚신을 만들어 끼니를 이어가던 박사의는 하루 한 사발의 술 혹은 삶은 콩 한 주먹만 먹으며 지냈습니다. 급기야 박사의의 건강을 염려한 교우들이 밥을 먹도록 강권하자 박사의는 그들의 애원에 못 이겨 그렇게 했으나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옥 안에서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옥살이가 열두 해를 헤아리던 1839년, 조정은 다시 박해를 가하며 지난날 사형을 선고받은 모든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라 명했습니다. 형장으로 향하던 박사의는 이런 말로 동료들을 격려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해 동안의 고난의 결실을 맺을 터이니 슬퍼하지 맙시다. 천주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천주를 찬양합시다.” 박사의는 1839년 5월 26일, 대구에서 참수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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