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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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1-04 ㅣ No.1395

[124위 시복 특집] 한덕운 토마스(1752~1802년)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 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바로 그 이듬해에 윤지충이 체포되어 순교하였음에도 한덕운은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습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입국 소식을 들은 그는 성사의 은총을 받고자 주신부를 만나려고 애썼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1800년 10월, 한덕운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기도와 영적독서에 열중하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교우들과 함께하는 영신수련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습니다.

이듬해 초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회와 교우들 소식이 궁금해진 한덕운은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한 뒤 한양에 올라갔습니다. 청파동을 지나던 한덕운은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 루카의 시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라고 비통한 마음이 든 그는 시신에 애도를 표한 후, 부친과 함께 순교하지 못한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엄히 질책했습니다. 홍재영은 그 뒤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 1839년에 순교했습니다. 한덕운은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습니다. 당시와 같은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한덕운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동료를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떤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한덕운은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참수형으로 순교하던 날, 형장의 한덕운은 자기 손으로 직접 참수 목침을 가져다 턱밑에 괴고는 온화한 시선으로 망나니를 바라보며 “단칼에 내 목을 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망나니가 헛칼질을 하는 바람에 한덕운의 머리는 세 번째 칼을 받고서야 땅에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1802년 1월 30일로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1월 2일 위령의 날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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