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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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정광수 바르나바와 윤운혜 루치아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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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25 ㅣ No.1392

[124위 시복 특집] 부부 정광수 바르나바(?~1802년) · 윤운혜 루치아(?~1801년)


“저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졌고, 주문모 신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였습니다. 또 천주교 성물을 만들어 곳곳에 배포하였고, 교우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노력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형조에서 한 정광수의 최후 진술 중에서)



정광수 바르나바는 경기도 여주 부곡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791년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뒤 세례를 받고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정광수는 양근에 살던 윤운혜 루치아와 결혼하였는데, 윤운혜는 윤유일의 사촌 동생으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정광수의 부모가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정광수와 윤운혜 두 사람이 교회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교회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랐지만, 조상 제사에 대한 부모의 강요와 마을 사람들의 비난으로 인해 1799년 한양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정광수 부부는 홍필주, 강완숙, 정복혜 등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인 교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 마당 한편에 따로 집회소를 마련하여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으며, 자주 주 신부를 모시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성물이나 교리서가 매우 부족하였습니다. 이에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던 정광수는 교회 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또 아내 윤운혜와 함께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이나 묵주 등을 제작하여 보급하고, 가까운 교우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모임을 갖곤 하였습니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 아가타가 체포되자, 이들 부부도 머지않아 자신들이 체포될 것을 예감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미 사학의 우두머리로 지목된 정광수에게 체포령이 내려진 상태였으므로, 윤운혜는 남편을 피신시킨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의 집에 숨겨 놓았습니다. 혼자 남아 집을 지키던 윤운혜는 1801년 2월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문받았습니다.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며 굴복할 줄 모르던 윤운혜는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고,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습니다.

한편 당시 정광수는 한양과 지방을 오가며 이리저리 피신하던 중이었는데, 포졸들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더 이상의 피신을 단념한 채 스스로 그들 앞에 나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습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정광수는 여러 차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무수한 곤장을 맞았지만 끝내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그는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1802년 1월 30일, 고향 여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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