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강론자료

2012-0311...주일...나는 무엇을 깰 것인가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2-03-10 ㅣ No.1194

사순 제 3 주일 (나해)

탈출기 20,1-17           1코린토 1,22-25           요한 2,13-25

2012. 3. 11. 등촌3

주제 : 나는 무엇을 깰 것인가

사람이 늘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삶에 실천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 중요한 실천하다보면, 다른 사람과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내가 하던 주장을 뒤로 물리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민주사회에서는 배우고 그렇게 삽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에서 말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논리입니다. 그렇게 타협과 조정의 길만 제대로 구별해서 실천하고 산다면, 세상에서 사람이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좋은 결과를 내가 다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남에게 양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게 민주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세계와 신앙을 기본으로 해석하는 세계에 타협은 없습니다. 타협을 통한 물러섬도 없고, 양보도 없습니다. 그렇게 신앙세계의 주장과 민주사회의 주장을 비교하면 어느 쪽의 등급이 더 높겠습니까? 사실은 이렇게 질문하는 방법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싸움은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싸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양세계에는 아직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만, 서쪽 아시아와 유럽세계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하는 논리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하는 논리가 부딪힌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나는 세상의 싸움은 이슬람교의 세력이 그리스교의 세력에 눌리고,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승리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 모습도 얼마나 갈지는 모릅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으로 생각한다면 유대교의 논리와 아직은 그 모양을 갖추지 못한 그리스도교의 논리가 부딪히는 싸움내용입니다. 신앙의 입장을 나누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만, 드러난 모습은 성전에서 해도 좋은 일은 무엇이냐 하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해석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시고 한바탕 일을 벌이십니다.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 소란이 될 수도 있고, 혁명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서 요한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이야기를 이해하겠습니까?

 

사회는 늘 평온하게 가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존에 움직이던 일과 색다른 것이 나타나면 사회의 불순세력이라고 매장당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불순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웬만해서는 살아남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기존사회로부터 불순세력이라고 배척된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그리스도교와 그 공동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요? 옛날의 왕정사회와 군주사회가 그리운 사람도 있겠지만, 늘 같은 왕조, 늘 똑같이 높은 사람, 늘 똑같은 신분제도가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만족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삶에서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깨트릴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바꾸고 깨트린다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접시를 단단한 바닥에 떨어뜨려서 두 번 다시 쓸 수 없게 조각조각으로 만드는 것으로 알아듣지는 말아야 합니다. 또 지금 사회의 단점을 이야기하되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게 하는 극단적인 모습은 아니어야 바꾸고 깨트린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전정화사건이라고 요한복음사가가 전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대하신 것일까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삶의 원칙은 기억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일을 벌인 예수님의 행동을 그곳에 있던 힘깨나 쓴다던 사람들은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성전을 파괴하자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들의 질문에 따라 나온 말씀을 아주 편협한 시각으로 본 사람들이 해석한 내용입니다. 기존세력을 유지하고 옹호하려고 하고, 내가 누리는 권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주기 싫었던 사람들이 하는 반발의 소리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반발을 드러냈던 사람들은, 탈출기말씀으로 들은 것과 십계명,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담은 십계명(十誡命)’을 몰랐던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늘 탈출기독서와 요한복음을 통해 들은 말씀을 생각하면 사람이 바뀐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온전하게 적용되기는 참 힘든 일입니다. 하느님이 가지셨을 힘이 약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도록 인간이 협조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이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다릅니다. 하지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일 뿐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내용이 바로 하느님의 한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나를 쓰러트리고 나를 항복시키면 그때 가서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가당찮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나의 목숨이 끝날 때가 되었거나 내가 내 힘으로 움직이지 못할 때 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발전하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적용되는 세상이 되려면, 과거의 껍질이 깨야 합니다. 그래야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고, 완성을 향한 첫 걸음이 시작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 잠시 묵상할 시간입니다.



57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