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경상도의 복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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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11 ㅣ No.1414

한국 순교자 124위 복자 (마지막회) 경상도의 복자들



경상도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경상도 밀양 사람인 신석복 마르코는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밀양으로 압송됐다. 형제들은 포졸들에게 뇌물을 주고 그를 빼낼 계획을 세웠지만 그는 형제들에게 한 푼도 주지말라고 당부했다. 이 때문에 대구로 가는 동안 능욕을 당하고 도착해서는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놓아준다 해도 다시 하느님을 믿을 것이오.”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구한선 타대오는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운명적으로 신자가 됐다. 그는 교리를 배운 뒤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며 살던 중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거제도 전교에 동행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옥에 갇혀 주요교리를 설명한 글을 관장 부인에게 전했고 그 글을 읽은 관장 부인이 그를 석방해주도록 요청했지만 화가 난 관장은 그를 매질했다.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 그를 보고 더 화가 난 관장이 형리들을 꾸짖자 구한선은 “늙으신 어머니가 문밖에 있을 터인데 만일 신음소리를 내면 어머니가 이를 듣고 기절하실 것이므로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모진 형벌을 당한 뒤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고문의 상처로 7일만에 순교했다. 순교한 그의 이마에는 ‘품’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 진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찬문 안토니오는 먼저 입교한 아내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되어 41세 때 입교했다. 병인박해 때 신자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알고 지내던 하급관리가 배교하면 풀어 주겠다고 유혹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25일 동안 옥에 갇혀 혹독한 형벌을 받았고 모든 재산은 압수되어 가족들의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넣어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옥에서 끌려나와 무참히 매를 맞은 그는 그날 밤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지만 장사를 지낼 때까지도 몸이 굳지 않고 얼굴에 혈색이 있어 산 사람같았다.

제주도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사람들은 ‘김 선달’이라고 불렀다. 배를 타고 장사를 다니던 그는 무역차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지 한 달이 지나 중국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었다. 그는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당시 휴양 중이던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됐다.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기도문을 외우며 신앙이 깊어졌고 1857년 5월 31일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귀국했다. 그는 가족과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베르뇌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는 등 계속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65년 두 번째로 난파를 당한 그는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프티장 신부를 만나고 다음해 귀국했다. 이후 육지로 나와 다시 리델 신부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사공 두 명을 영세시켰다. 제주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해왔던 그의 신앙활동은 병인박해로 중단됐고 그는 무역을 위해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밝혀져 체포됐다. 옥에 갇혀서는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했으니 그대들도 마음 변치말고 따라오라.”고 권면했던 그는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관장은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했다.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하급관리를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대로 생활했다. 그는 관청에 있어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었고 친척들과 이웃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으며 비신자들이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마다 달려가 대세를 주었다. 칼래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은 그는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칼래 신부를 집에 숨겨 주었으며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한실로 동행했다.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한 칼래 신부의 명으로 집에 돌아온 그는 얼마 후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어떤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는 문경 인근에서 붙잡혀 옥에 갇힌 교우들을 권면했고 이에 많은 이들이 용기를 얻어 순교의 길을 갔다. 그는 죽음직전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서 살던 이정식 요한은 젊은 시절 무과에 급제해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쏘는 법을 가르쳤다. 59세 때 입교한 뒤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그는 얼마되지 않아 회장으로 임명됐다. 누구보다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며 화려한 의복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음식을 먹으며 애긍에 힘썼던 그는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던 중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했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포졸들에게 교우들과 아들 이관복 프란치스코, 조카 이삼근 베드로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자수했다. 동래로 압송된 그는 그곳에서 대사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했다.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했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누구도 배교하지 않은 가운데 그는 아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경상도 동래 좌수였던 양재현 마르티노는 이정식 회장을 만나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고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병인박해 시기인 1868년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알려져 체포된 그는 문초와 형벌,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옥에 갇힌 그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 배교를 거부해 다시 옥에 갇혔다. 그러나 옥졸의 꾀임에 넘어가 몰래 빠져 나왔던 그는 도망쳤다는 옥졸의 거짓 보고로 다시 체포됐다. 이후 그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고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신앙을 증거하다 모진 형벌을 받고 장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경상도 김해 사람인 박대식 빅토리노는 천주교에 입교한 후로 언제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병인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과 김해 포졸들이 들이닥쳐 예비신자였던 조카와 함께 집에서 체포됐다. 그는 옥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동료로 만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한 뒤 3일 만에 대구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했다. 그는 조카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들의 시신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명분 아래 머리가 높이 매달렸다.

윤봉문 요셉은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가족은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했다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통영시 이운면)에 정작했다. 복음 전파를 위해 힘썼던 부친의 영향으로 진 요한의 딸 아녜스와 결혼한 그는 1887년 겨울 경상도 담임 로베르 신부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도 도왔다. 그 해 15명이 세례를 받았다. 로베르 신부가 떠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개인적인 탐욕으로 일어난 박해로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지만 홀로 통영으로 압송됐다. 모진 형벌에도 배교를 거부한 그는 진주로 이송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다시 이송된 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십계명을 외우면서 신앙을 굳게 증거했다. 옥에 갇힌 그날 밤 관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옥리들에 의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베르 신부는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다는 내용 등을 교구장에게 보고했다.(참고문헌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초상 제공 :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124위 복자는 103위 성인보다 먼저 순교한 초창기 순교자들로 신해박해(1791년) 3위, 을묘박해(1795년) 3위, 정사박해(1797년) 8위, 신유박해(1801년) 53위, 그리고 신유박해 이후인 1814년 1위, 을해박해(1815년) 12위, 1819년 2위, 정해박해(1827년) 4위, 기해박해(1839년) 18위, 병인박해(1866-1888년) 20위이다. 순교지별로는 한양,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가 있고 한양에서 가장 많이 순교했다. 교회는 이들의 시복을 기리며 내년부터 매년 5월 29일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기념일’ 을 지내게 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기꺼이 목숨을 바친 124위 복자를 맞이하는 동안 신앙선조들의 삶과 그 정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름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오늘의 교회로 발전되어 왔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이제 우리는 신앙선조가 물려준 신앙을 현재의 삶 속에서 잘 지키며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 ‘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을 앞두고’는 8월 16일 시복식이 거행됨에 따라 ‘한국순교자 124위 복자’로 꼭지 제목이 변경되어 연재됩니다.

● 지금까지 ‘한국 순교자 124위 복자’를 애독해 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월간빛, 2014년 12월호, 
김선자 수산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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