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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하느님 중심의 새로운 윤리관 - 칠극(七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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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35

[신앙 유산] 하느님 중심의 새로운 윤리관 : 칠극(七克)

 

 

머리글

 

문자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큰 선물이다. 사람들은 문자를 가지고 문화를 창조하며, 그 문화를 보존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하느님의 선물인 문자를 통해 하느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 신앙이 전래된 것도 문자를 통해서였다.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 서학서(西學書)가 조선에 전해지자 우리 지식인들은 이를 읽고 연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때 전해진 서적들 가운데 우리 나라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판토하의 “칠극”을 들 수 있다. “천주실의”가 유교적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을 밝혀 준 책이라면, “칠극”은 그리스도교적 수양관과 인간관을 제시해 준 책이었다. 또한 “칠극”은 유교적 수양에 정진하던 우리의 지식인들에게도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던 책이었다.

 

“칠극”은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어린 교회의 새로운 신도들은 이 책을 통해서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고 자기 수양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한글로 번역이 되어 신도들에게 읽히고 있었던 이 책은 그리스도교적 윤리관과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지은이는 누구인가

 

“칠극”을 지은이는 중국에서 선교에 종사하던 판토하(Didace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년) 신부였다. 그가 중국의 마카오에 도착한 때는 l599년이었다. 이때가 우리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였다.

 

그는 중국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년)를 만나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1600년 마테오 리치를 따라 북경(北京)으로 가서 리치와 함께 문화 적응주의적 입장에서 선교하기 그는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칠극”, “인류시원”(人類始原), “수난시말”(受難始末), “실의속편”(實義續編) 등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명(明) 나라 황실의 요청에 따라 천문과 역산(歷算)에 관한 저술 작업에 착수했다.

 

17세기 중국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의 첫 과제는 중국인들에게 자신이 야만인이 아니라 훌륭한 문화 전통을 가진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중국에서 “제왕의 학문”(帝王之學)으로 존중받던 천문학을 연구, 이를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제시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로써 자신들도 중국인과 대등한 존재임을 인정받고자 했고, 또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에 놓여 있었던 중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조화를 생각하며 마침내는 보유론(補儒論)과 같은 적응주의적 선교 이론을 창출해 낼 수 있었다.

 

 

“칠극”의 가르침

 

판토하가 지은 “칠극”은 “칠극대전”(七克大全)으로도 불리었다. 이 책은 1614년 북경에서 7책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그 후 다시 1643년에 재판이 간행되었고 1798년에는 구베아 주교의 감준을 받아 3판이 발행되었다. 또한 1849년과 1873년에도 간행된 바 있었으며, 1857년에는 “칠극진훈”(七克眞訓)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으로 된 축약본이 발간되었다. 한편 “칠극”은 명나라 말기에 편찬된 “천학초함”(天學初函) 안에 포함되어 한자 문화권 안에서 더욱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었다.

 

“칠극”은 유럽어로는 “일곱 가지의 승리”(Les 7 Victoires)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다. 이 제목 자체에서 암시되고 있는 바와 같아 이 책에서는 일곱 가지에 이르는 죄의 원인(七罪宗)을 극복할 수 있는 일곱 가지의 덕행 (七樞德)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칠극”의 요약된 내용을 우리의 순교자 윤지충의 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윤지충은 1791년 전주에서 신문을 당할 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칠극’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칠극은 이러합니다. 교만을 이기기 위한 겸손, 질투를 이기기 위한 애덕(愛德), 분노를 이기기 위한 인내, 인색을 이기기 위한 희사의 너그러움, 탐식(貪食)을 이기기 위한 절식(節食), 음란을 위기기 위한 금욕, 게으름을 이기기 위한 근면, 이 모두가 덕을 닦는 데 도움을 줌이 명백하고 정확합니다.”

 

판토하는 일곱 편으로 된 이 책에서 매편마다 성경 말씀을 자주 인용하고 있으며, 아우구스띠노나 프란치스꼬 등과 같은 성인 및 아리스토텔레스,세네카와 같은 현인들의 말들을 풍부히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나라의 이가환(李家煥, 1742~1801년)과 같은 인물도 그 적절한 비유에 일단은 감탄한 바 있었다. 판토하는 유럽의 스토아 철학이나 그리스도교 윤리론을 유가적(儒家的) 용어를 구사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는 개신 유학의 윤리관에서 기본이 되는 범주를 수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등과 같은 그리스도교 고유의 가르침을 우선적으로 전하기보다는 이 세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 구체적 삶 안에서 사악함을 극복하고 덕을 닦는 법을 먼저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유교적 지식인들에게 접근하고자 했고, 이러한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신(神) 중심적 윤리관을 소개했다. 당시의 유가에서 강조하던 효제(孝悌)나 충신(忠信)과 같은 윤리관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윤리관이었지만, 칠극에서는 그 윤리의 초점을 하느님인 천주께 맞추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 내부에 적용되는 윤리도 하느님과 연결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예를 들면 그는 유교의 인(仁)이라는 말을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란 개념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면서도, 인(仁)이란 사람들이 신적(神的) 사랑을 가지고 남을 사랑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볼 때에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렇듯 그는 유가의 용어를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설명했던 것이다.

 

 

“칠극”의 전래

 

“칠극”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우리 나라의 학자들은 칠극에 관한 논평을 남기기 시작했다. 즉, 이익(李瀷, 1618~1763년)은 이 책이 유학의 극기설(克己說)과 한가지라고 전제한 다음 칠극의 내용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 설명의 순서가 정연하며 비유가 적절하여 간혹 유학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에 안정복(安鼎福, 1712~1791년)은 이 책을 읽고 평하기를 칠극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며, 그 안에 비록 심각한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취할 바가 못된다고 했다.

 

이익의 제자였던 홍유한(洪儒漢, 1726~1785년)은 1770년부터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시도했다. 그가 실천했다는 윤리의 내용을 살펴볼 때 그도 칠극을 읽었으리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한편 1777년 주어사(走魚寺) 강학 때에 이벽(李檗)은 분명히 칠극을 소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회가 창설된 1777년을 전후하여 이가환, 정약용 등도 이를 읽고 있었다. 이렇듯 칠극은 교회 창설 초창기에 있어서 그 창설 작업에 참여했던 유교적 지식인들에 있어서는 필독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칠극”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까지 우리 나라 신도들의 윤리 생활을 이끌어 주고 그 수양에의 길을 가르쳐 준 대표적 서적이었다. 그 후 1850년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천주가사”에서도 우리는 “칠극”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지만, 칠극은 대체로 초창기 교회에 있어서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801년 정부 당국에서 ‘척사윤음’을 발표했을 때에도 칠극은 특별히 지적되어 공격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남은 맡

 

“칠극”은 하느님 중심의 수양 논리를 유교의 용어를 빌어 서술해 주고 있는 그리스도교 수양서이며 윤리서이다. 이 책은 18세기 이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서 주목받았고, 우리 나라 교회의 창설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책자였다. 이 책은 우리 나라 신도들의 이상적 윤리관의 구체적 내용을 오늘의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칠극”은 우리 나라 철학 사상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정약용은 그의 새로운 인간론을 전개할 때 “칠극”에서 제시한 인간론의 구조를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영명성(靈明性), 자주지권(自主之權)과 같은 용어까지도 그대로 수용하여 인간의 영혼에 대한 문제나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자유의 개념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칠극”은 교회 창설 초기부터 한글로 번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글로 번역된 “칠극” 필사본들이 서울의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과 한국교회사연구소 등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 필사본들이 작성된 연대를 현재로서는 정확히 밝혀낼 수 없다.

 

[경향잡지, 1993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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