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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 영성: 단풍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장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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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0 ㅣ No.797

[생태 영성] 단풍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위령성월에 생각하는 장묘문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은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 그들과 어떤 접촉을 유지하고자 여러 장묘문화를 형성해 왔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장묘방식은 매장의 형식이다. 무덤이 없다는 것은 망자에게 저주가 된다고 여겨(이사 14,19; 신명 28,26; 예레 16,4) 매장을 하였으며, 후손들은 묘지관리와 조상들의 묘에 함께 묻히는 것으로 효심을 표현하였다(창세 23장; 49,29-32; 50,12-13).

 

이처럼 매장은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장묘방식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죽은 자의 숫자만큼 늘어나는 묘지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매장 위주의 장묘관행으로 해마다 많은 국토가 묘지로 변하고 있어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막고 자연환경을 훼손하는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분묘 수는 약 2,000만 기로 전체 면적이 서울시의 1.6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해마다 여의도 면적의 1.1배가 묘지로 잠식된다고 한다. 또한 명당 의식에 의거한 호화 분묘들은 환경파괴를 더욱 가속시킨다.

 

이와 같은 현상을 극복하고자 정부는 납골당을 장려해 왔다. 그러나 납골당 또한 환경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좁은 공간에 많은 수의 유골이 안치되어 고인과 직접적인 접촉이 자유롭지 못하고 예의를 표하는 데에도 제약을 받는 등 문제가 있다. 또한 봉분묘는 수십 년 돌보지 않으면 수목들이 자라나 자연 상태로 돌아가지만, 호화 납골묘는 석물들이 오랫동안 보존되어 큰 폐해를 남긴다.

 

 

수목장(樹木葬)

 

이러한 연유로 1999년 스위스를 필두로 독일, 영국, 일본 등에서 수목장이 새로운 장묘정책으로 시행되어 각광을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2008년 장사법을 개정하여 수목장을 허용하는 법을 마련하였다.

 

수목장은 화장한 시신의 유골을 나무 아래 묻고 나무에 고인의 명패를 다는 것다. 이로써 유골은 나무의 밑거름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고인의 유가족이나 친지는 언제든지 그 나무를 찾아가 고인을 기억할 수 있고, 잘 단장된 주변 숲은 훌륭한 쉼터를 제공해 준다.

 

생태적인 차원에서 수목장은 고인의 시체가 땅으로 돌아가 자연적으로 분해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순환하는,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수목장은 기존의 봉분묘나 납골묘와 같은 폐해가 없으며, 오히려 지구온난화를 촉진하는 탄소를 흡수하는 역할(Carbon Sink)을 하고, 이산화탄소를 생명에 유익한 산소로 바꾸어주면서 지구의 생태계를 되살리기 때문이다.

 

수목장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봉분묘나 납골묘는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을 하더라도 혐오시설로 취급되어 님비 현상을 초래한다. 그러나 수목장은 아름다운 숲으로 좋은 경관과 쉼터를 제공할 뿐 아니라, 살아있는 나무가 고인을 기억하는 매개가 됨으로써 죽음보다는 생명과 순환의 원리를 알게 해준다. 그를 통해 인간의 생명과 나무의 생명이 다른 것이 아니라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해주어 자연에 대한 사랑과 존중심을 키울 수 있다.

 

또한 수목장은 혐오감이 들지 않으므로 정원과 같은 생활공간에도 위치할 수 있어 삶과 죽음의 상관관계를 잘 인식시켜 줄 수 있다. 살아가면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슬픔을 재연하고 두려움을 가중시키기보다는, 현재의 삶을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와 수목장

 

수목장은 근래에 새롭게 생겨난 장묘문화는 아니다.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의 유모 드보라가 참나무 밑에 묻혔으며(창세 35,8),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은 불에 태워 뼈를 추려 향엽나무 밑에 묻혔다(1사무 31,12-13; 1역대 10,12). 이처럼 생태적인 이유에서는 아니지만 구약성경에서도 수목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임을 말한다(창세 2,7; 3,19). 세상에 태어나 흙에서 난 것들로 생명을 유지하던 인간이 자신의 몸을 흙으로 되돌려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수목장은 납골당(묘)보다 흙으로 돌아가는 좀 더 자연스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 신앙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부활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함을 믿는다. 부활 신앙은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시작되었다(마태 28, 1-10). 비어있는 무덤은 부활의 상징이 될 수 있으나, 봉분묘나 납골묘(당)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상징성이 미약하다.

 

하지만 수목장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연관성을 인식하게 하여 하느님의 창조물들을 사랑해야 하는 당위를 제공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거대하게 자라며 살아있는 나무와 순환 원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훌륭한 상징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 신앙을 통해 죽음이 괴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행복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천국을 희망하지만 지금 당장 천국에 가고자 죽으려 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해소되지 못함으로써 부활의 전제인 죽음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목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숙에도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목장이 정원과 같은 생활공간에 있을 때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는 말씀을 생활 속에서 상기시켜 주어 우리의 삶을 성찰하여 구원의 길로 안내해 주는 일상의 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목장과 생태 영성

 

인간은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서로 긴밀히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자연파괴를 자행하였다. 자연 생명을 자신과 관계 없는 존재로 여겨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파괴와 남용을 거듭하여 온 것이다.

 

봉분이 있는 묘이든 납골묘이든 인간의 주검은 언젠가는 다른 생명체들과 연관을 갖는다. 그러나 수목장은 직접 나무를 살리는 거름으로 작용하게 되어 생명의 순환고리를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나무(자연)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일깨워주는 표지가 된다.

 

이러한 상호연관성에 대한 인식은 창조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모든 생명의 순환이 창조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생태 영성을 진작시키는 좋은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목장은 아름다운 숲을 가꾸고 보전함으로써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죽음을 자매로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도와줄 것이다.

 

 

웰다잉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으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다. 그러므로 웰빙뿐 아니라 웰다잉도 중요하다. 어느 날 갑자기 준비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는, 적어도 자신의 삶뿐 아니라 죽음도 스스로 잘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자신의 일생과 생의 마지막 이후까지 미리 계획하여 기록하는 ‘엔딩노트(Ending-Note)’가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엔딩노트에는 희망하는 장례의 형태를 기록할 뿐 아니라, 자기의 일생 전체를 마무리하는 내용을 담아두어 준비된 웰다잉을 맞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수목장은 후손과 자연환경에 이로움을 줌으로써 웰다잉을 가장 잘 구현하는 장례절차로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의미 있는 제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가을 단풍처럼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아마도 그것이 나뭇잎의 생명으로는 마지막 순간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나뭇가지에 의지하여 나무줄기를 통해 뿌리가 흡수한 대지의 영양분을 전달하고 광합성을 하여 자신의 몸통을 살리며, 세상으로 맑은 공기를 내보내는 역할을 다하고 난 뒤, 자신의 푸른 모습을 내려놓고 울긋불긋 찬란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단풍은 그 색깔로 죽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듯하다.

 

단풍은 마지막 아름다움을 뽐내며 결국 자신을 지탱하고 자신의 수고를 돌려준 끈이었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나뭇가지와 영영 이별하는 것은 아니다. 나뭇잎은 썩어 또 자기 생명의 어머니인 땅의 일부가 되어 나무뿌리에 영양분이 됨으로써 나무의 일부로 계속해서 존재한다.

 

인간이 죽어 나무 아래 묻히게 되면 나무는 자신의 그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해마다 연출하여 나 자신과 후손들에게 위안을 줄 것이다. 웰다잉이란 나무들처럼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인생의 황혼기인 노년에 인간의 진면목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이들은 단풍처럼 아름답다.

 

 

다음을 실천해 봅니다.

 

1. 엔딩노트를 작성하고 웰다잉을 위한 수목장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2. 선산에 숲을 조성하여 수목장으로 이용합니다.

 

* 이동훈 프란치스코 - 제천 남천동성당 주임신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생태신학을 전공하였다. 생태영성연구원 공동대표이다.

 

[경향잡지, 2010년 11월호, 이동훈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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