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강론자료

2011-1225...성탄날...하느님이 오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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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12-25 ㅣ No.1147

[1225] - 성탄대축일 낮미사

이사야 52,7-10            히브리1,1-6                  요한 1,1-18

2011. 12. 25. . 등촌3

주제 : 하느님이 오시는 날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성탄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정말로 기쁠까요? 때로는 별로 생각 없이 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성탄날은 정말로 기쁜 날인가요? 아니면 남들이 기쁘다고 말하기도 하고, 똑같이 하지 않으면 왠지 소외되고, 바보가 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하시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말하지는 않을까요?

 

이게 됐든, 저게 됐든 삶의 변화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삶이 좋아지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변화(變化)’라는 말을 씁니다. 나빠지는 쪽으로 변하는 것은 변화라는 말보다는 악화(惡化)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구별을 하니, 우리가 사용하는 변화라는 말의 의미는 선화(善化)‘라는 의미가 강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어제 밤부터 기억했고, 오늘부터 한 동안 기억할 성탄이 어째서 기쁜 것이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오늘까지는 그런대로 사용하겠지만, 내일부터는 크리스마스라는 말 대신에, ‘해피 뉴 이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에 더 많은 초점을 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와 뉴 이어가 서로 붙어 있는 말은 아닌데, 우리는 쉽게 사용합니다.

 

세상에서는 오늘까지 성탄을 얘기하고 기억합니다만, 우리 신앙의 전례에서는 올해가 다 지나고, 내년의 1월 초순이 다 지나도록 앞으로 보름간 성탄의 의미를 되새길 것입니다. 이렇게 구별한다면, 예수님의 탄생을 대하는 의미는 아무래도 세상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 그 본뜻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날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어떤 책(=‘신을 위한 변론’, The case for God)에서 보니, 지금부터 3000년 전쯤에 살던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와 근거에 대한 해석을 하고 싶어서 사용하기 시작한 표현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이라는 인격체로 번역된 로고스라는 말과, 우리가 세상에서 그저 이야깃거리로만 기억하는 신화라고 번역하는 외국어, ‘미토스라는 말이었다는 설명을 봤습니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학자의 말이니, 그가 하고 싶을 말을 있는 전부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표현은 그랬습니다.

 

이 로고스는 하느님이시기도 하고, 하느님을 알려주신 분이기도 하며,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기도 하고, 세상에 구원자로 다시 사람의 세상에 들어오신 분이기도 하다는 것이 오늘 요한복음사가의 선포이고, 말씀이며, 우리는 그 말을 신앙선포의 내용으로서 이 미사시간에 함께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들은 말씀은 이 로고스가 세상에 태어난 과정까지만 선포한 내용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시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신앙의 기준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인 성탄을 오늘까지만 기억하는 데 비해서, 신앙에서는 성탄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부터라는데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선택할 수 있다면 세상의 기준을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신앙의 기준을 따르겠습니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기대한 구세주,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질문의 내용은 과거의 사람들이 어떤 자세였을까 하는 것이지만,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지난 세상 사람들의 자세가 아니라, 그들이 대답하고 살았던 것들을 통해서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삶에서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정말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길을 안다고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기에 소홀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은 그 올바른 것을 각자 자기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넘어갈 질문도 아주 어려운 것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변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보시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세상에 탄생하시게 했다는 것은 사람의 지식과 상식수준에서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에게서 받고 싶은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어서, 무엇을 바라신다고 그런 일을 하셨을까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질문하면 우리는 대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길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대답은 하느님은 당신의 필요에 따라서 움직이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느님은 오지랖도 넓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사람의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오지랖은 넓습니다’(=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런 사랑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더 크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어 사람으로 세상에 들어오신 특별한 일을 기억하는 날,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아듣고 이해하며,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억하는 날, 그 지혜도 깨달을 수 있도록 잠시 기도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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