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강론자료

2014-1225.....성탄대축일 낮미사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12-25 ㅣ No.1666

[1225] - 성탄대축일 낮 미사

이사야 52,7-10        히브리1,1-6       요한 1,1-18

2014. 12. 25. .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의 선택에 따른 우리의 응답은?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성탄대축일입니다.

성탄인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영어를 써서......MERRY CHRIST-MAS 하면 좀 더 유식하고 배운 티가 날까요?

아니면, 우리말을 써서, ‘즐거운 성탄다르게는 성탄을 축하합니다(!)’ 또는 즐거운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면 말이 길어서 좀 부담스러울까요?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성탄은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참 많지만, 그의 탄생이 온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 어떤 사람의 탄생을 전 세상에서 같거나 비슷한 시간에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이러한 일을 겪는다면,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으로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가 사람이라면 갖거나 드러내야할 모습이 한두가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분은 순수한 사람으로 그 격을 떨어뜨릴 분도 아닌,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이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세상에 내려오시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설명하려는 것이 조금 전에 들은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로고스 이론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로고스(LOGOS)...우리말로는 말씀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는 용어이고,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한참 전인, 대략 500년 전쯤부터, 그리스철학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의미가 규정된 낱말입니다. 그 로고스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철학에서 받아들이고 규정한 낱말의 의미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의 개념이었는데, 그 개념이 히브리신앙으로 들어오면서 인격체가 되었고, 그 인격체는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로 뜻을 고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에서는 로고스(!)’하면, 히브리신앙을 통한 그리스도교신앙에서 정의한 대로 알아듣게 된 용어가 되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로고스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느님과 함께 있던 분, 바로 하느님이신 분, 만물이 생긴 근원, 생명을 간직하신 분, 세상에 구원을 주는 분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한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내용들을 오래된 신학의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에 오신 여러분들이 신학이나 철학의 내용을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용어를 써서 지금 말하고 있는 저도 그 내용에 대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도 되고, 사람이 안다는 것이 모든 것의 완성은 아니라는 표현도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의 말씀과 딱 맞는 내용은 아닙니다만, 이사야예언서의 말씀도 하느님의 구원소식을 들고 사람에게로 올 전령에 대한 얘기를 전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가까웠다고 선언하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둘 중의 한가지일 것입니다. 적극적인 찬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한 부류이고, 하느님의 구원을 나는 받아들일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 하는 것이 두 번째 부류일 것입니다. 두 가지의 장점만을 합친 중간(中間)’은 없습니다. 회색은 없다는 얘기라면, 찬성이든지 반대든지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해서 우리는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은, 우리의 찬성과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으니 서글픈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게 원래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서 세운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판단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독서로 들은 말씀에는, 하느님께서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히브리인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왔음을 선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절과 2절의 앞에 있는 말씀인데, 다시 읽으면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때는 마자막 때라는 것이 맘에 걸리는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양단간에 결단을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만 알아듣는다면 문제는 없을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때, 어제 밤에 재현한 예절과 오늘 기억하는 내용, 또 앞으로 성탄시기동안 우리가 기억하고 실천할 내용을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드님이 주신 은총과 기쁨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차기를 기도합니다.

 



61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