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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길을 따라 전해진 신앙 - 준주성범(遵主聖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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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27

[신앙 유산] 길을 따라 전해진 신앙 : 준주성범

 

 

신앙의 길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세워진 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어 구속 사업을 전개하셨고 수난 · 부활하신 이스라엘 성지였다. 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로마 제국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로마 제국의 판도 안 여러 곳에 전파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 지역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고, 유럽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등뼈와 같은 구실을 맡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럽 이외의 지역에 전파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5세기 “지리상의 발견”이 단행된 이후 그 신앙은 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전수되었다. 이때 아시아에 전래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스라엘 지역의 히브리즘(Hebraism)적 전통파 함께 유럽에서 발천된 중세 신학의 요소들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지리상의 발견자’들이 개척한 뱃길을 따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전해진 그리스도교 신앙은 현지의 고유한 문화에 적응해 가면서 아시아에서의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에 진출한 선교사들도 천주교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저술했고 이곳의 유교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선교에 임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의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는 길, 그 길은 다시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에 이르렀고 조선과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결속을 다지는 사행로(使行路)로 불리었다. 이 사행로를 통해 중국에 전래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조선에 전래될 수 있었다. 조선에 전래된 가톨릭 신앙은 유대의 전통과 당시 유럽 신학의 지적 특성 그리고 중국 문화에 의해 재조명된 사상을 고루 간직하고 있었다.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우리의 지성들은 중국 문화에 친숙했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중국의 문화에 의해 재해석된 가톨릭 신앙을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일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지 아니했다면, 마테오 리치와 같은 당대의 지성이 그리스도교와 중국 문화의 조화를 위해 노력한 바가 없었다면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기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준주성범”의 저자

 

“준주성범”(遵主聖範)은 그리스도교의 영성에 있어서 알맹이가 되는 기본 원리들을 명확히 밝혀 주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독일의 아우구스띠노회 수도자였던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년)에 의해 쓰여졌다. 유럽에서의 종교 개혁은 1517년에 일어났으니, 그가 살았던 시대는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약 한 세대 전 쯤에 해당된다. 이는 중세 사회의 몰락을 눈앞에 두고 그 몰락을 막으려는 자기 쇄신의 결의가 다져질 수도 있었던 때인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신(神) 중심의 중세 문화의 전형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금욕적 생활과 경건주의를 강조했고, 하느님의 무한한 영광과 인간의 나약성을 이 책을 통하여 극적으로 대비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도덕의 기준을 제시해 주었고, 이웃 사랑의 기초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있음을 설명했다.

 

그가 지은 “준주성범”(De Imitatione Christi,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신도들과 수도자들에게 이 책의 제목 그대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함을 일깨워 주며 그에 관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영신 생활로 인도하는 유익한 권고’, ‘신령한 생활로 인도하는 교훈’, ‘내적 위로에 대하여’, ‘가장 존엄하신 성체성사에 대하여’와 같은 네 개의 장 밑에 113개의 절로 나뉘어져 있다.

 

“준주성범”은 교회의 신심 생활에 큰 영향을 주어 16세기 이래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이냐시오 로욜라가 쓴 “영신 수련”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 운동에도 기여한 바가 적지 아니하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이 책이 계속 읽히고 있음을 볼 때 이는 그리스도교의 고전 가운데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 교회와 “준주성범”

 

토마스 아 켐피스가 거룩한 삶을 마친 지 2백여 년이 지나서 그가 지은 “준주성범”은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교화는 이질적인 한자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에게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의 알맹이를 전해 주게 되었다. 한 권의 명저가 가질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이렇게 실증되어 가고 있었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선교사 임마누엘 디아즈(Emmanuel Diaz, 陽瑪諾, 1574~1659년)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서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는 후일 “준주성범”이나 “그리스도를 본받음” 등으로 제목을 바꾸어 보급된 이 책을 “경세금서”(輕世金書)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하느님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인간의 세상을 가볍게 여기기를 바라며 1640년 북경에서 간행한 이 책은 원본의 4장 가운데 1장과 3장만을 번역한 것이며, 그 문체도 장중한 경서체(經書體)로 쓰여져 있었다. 이 때문에 일반적인 중국인들은 책을 읽기가 어려웠고 상당한 지식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이를 읽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모든 이에게 개방된 것이며, 그 가르침도 지식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전해져야 한다. 이에 중국 교회에서는 디아즈가 펴낸 그 고답적이고 어려운 번역본을 고집하기보다는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757년에는 브누아(Benoist, 蔣友仁, 1715~1774년) 신부와 로베르(Roberts, 趙聖修, 1703~1760년) 신부가 번역 주해한 완역판이 북경에서 간행되었다.

 

번역된 직후 이 책은 중국인 신도들로부터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그 후 이 책은 1914년 북경에서 드라플라스(Delaplace) 주교에 의해 “준주성범”이란 새로운 제목으로 다시 번역 · 출간되었다.

 

 

우리 교회와 “준주성범”

 

중국에서 “경세금서”가 간행된 이후 얼마 아니 가서 이 책은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 이 책이 언급된 국내의 기록으로는 “자책”(自責)을 들 수 있다. “자책”은 1801년 신유교난 때에 경상도 흥해로 귀양간 최해두(崔海斗)의 글로 전해지고 있다. “자책”에서는 ‘천사의 범죄’와 ‘원조의 타락’을 비유로 들어 인간이 잘못을 범하기 쉬움을 말하는 “경세금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책”에서 인용된 “경세금서”가 누구의 번역본인지는 확실치 아니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교회가 창설되기 직전 중국에서 평이한 한문으로 번역되었던 브누아와 로베르의 번역본이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디아즈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한글로 번역된 세 종류의 필사본 “쥰쥬성범”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이 책은 분명히 현대 활판본과는 다른 것으로서 1938년 활판본 “준주성범”이 간행되기 이전 한문본에서 번역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번역 작업은 중국에서 “준주성범”이란 책자가 간행된 이후부터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된 1933년 이전의 어느 시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나, 그 번역 시기에 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있어야 한다.

 

“준주성범”이 우리말로 처음 완역 간행된 때는 이미 언급한 1938년이었다. 이때 연길교구에서는 오삭조(吳朔朝, 요셉)가 라틴어 원본에서 번역한 원고를 활판으로 간행했다. 한편 이에 앞서 서울교구에서 간행하던 월간지인 “가톨릭 靑年”에서는 1933년 6월부터 1934년 7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그리스도를 본바듬”이란 제목 아래 방지거(方濟各)라는 세례명의 인물이 이 책을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다.

 

“가톨릭 靑年”에는 모두 제1장 제18절까지 실려 있는데 이를 번역한 ‘방지거’는 당시 그 잡지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던 정지용(鄭芝溶, 1902~1950년)이 틀림없다. 그는 당시의 대표적 시인으로서, 동일한 세례명으로 자신이 편집하는 잡지에 종교 시를 발표한 바도 있고, 그 시가 뒷날 그의 이름으로 다시 다른 책자에 수록된 경우도 있음을 미루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 1942년에는 윤을수(尹乙洙, 1907~1971년) 신부가 프랑스어에서 번역한 이 책이 간행 보급되었다. 이 “준주성범”은 1949년 성신대학에서 그 재판본이 간행되었고, 1954년에는 경향잡지사에서 이를 다시 간행하여 널리 보급되어 갔다.

 

또한 이 책은 1960년대 프로테스탄트 연구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음” 등의 제목으로 영어본에서 한글로 번역되어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도 기여한 바 있다.

 

 

마무리

 

우리는 “준주성범”의 번역 간행을 통해 유럽의 지적 전통이 우리의 정신적 유산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해 시대 때부터 전래된 이 책은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리스도교적 인간상의 단면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사행길을 따라 전해진 이 책은 오솔길을 따라 깊은 산속의 신도들에게까지 전해졌으며 신도들은 여기에서 가톨릭 신앙의 정수를 접했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갔다. 이로써 이 땅에 이르러 가톨릭 교회는 더욱 가톨릭적일 수 있게 되었다.

 

[경향잡지, 1992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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