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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누군 선교 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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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32

누군 선교 안하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신부의 기본 사명은 선교이고, 본당운영의 첫째 목적은 선교이기 때문에, 선교사 아닌 신부 없고, 선교본당 아닌 본당은 없다. 정말, 누군 선교 안하나? 그런데도, 전주교구의 팔봉성당과 오수성당은 선교본당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김봉술 신부와 내가 선교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파견되었다. 주교님께서는 이 일에 관해 특별담화문까지 발표하셔서 교구민의 협조와 기도를 당부하셨다. 새 임지로 떠나기 전에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 기자가 취재를 했고, 평화방송 TV에서는 전교주일 특집으로 방영하기까지 했다. 

 

교구 사제단과 신자들, 교회 매스콤의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팔봉 선교본당에 부임한 지 이제 다섯 달째, 그런데 과연 선교본당이란 무엇일까? 수도자, 사무장, 식복사 없이 신부 혼자서 모든 걸 해야 하는 시골의 작고 가난한 본당, 그 겉모습만이 선교본당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먼저 전주교구 주교님의 특별 담화문 몇 대목을 인용한다. 

 

"1997년 7월 18일에 ‘주교와의 간담회’라는 명칭으로 교구 내 젊은 신부님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 (중략) … 대단히 큰 비용을 들여 성당을 짓고 사제관과 부대 시설을 완비한 다음, 수도자, 사무원, 식당 책임자 등 사목 보조 인원까지 완벽하게 갖춘 이후에만 본당을 분리해서 사제를 파견하는 기존의 관례를 깨고,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 (중략) …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지팡이나 식량자루나 빵이나 돈은 물론, 여벌 내의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루가 9,3) … (중략) … 제자들을 사도로 파견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분부는 일반의 상식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것저것 빠짐없이 철저히 갖추어 떠나라고 하시는 대신,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마저 짐이 되지 않도록 몸 가볍게 떠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 (중략) … 진정한 사도의 이상은 이미 다른 이들이 일으켜놓은 교회를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에 뛰어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일 전체를 집 짓는 일에 비유한다면 사도는 기초를 놓는 사람인 것입니다. 기초를 놓은 다음 집을 짓는 일은 다른 사람의 몫입니다. … (중략) …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 교구에서는 기성 신자의 수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사제를 파견하여 투철한 선교정신으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선교본당’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 (하략) …" 

 

이 담화문대로 1997년 8월 31일자로 사제 인사발령이 있었고, 주교님의 파견 명령에, 기쁘게 가겠노라고 씩씩하게 응답한 나는 팔봉 선교본당에 부임하게 되었다. 

 

현재 팔봉본당 신자수는 87세대 241명, 그중 냉담자는 88명이다. 단체로는 쁘레시디움 4개와 여성 단체 2개가 있다. 1998년도 교무금을 신입한 세대는 57세대로 신입 총액수는 천만원 정도이고, 주일 헌금은 평균 24만원 정도이다. 교구 보조금은 전혀 없고, 특별한 수입도 없지만, 그럭저럭 빚 안지고 본당을 운영할 정도는 된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젊은 층의 이농현상으로 노년층이 대다수이고, 교적만 팔봉에 두고 다른 지역에 나가서 생활하고 있는 신자들도 많다. 

 

본당의 관할구역은 익산 시내 6개 본당을 전부 합한 것만큼 넓은데, 지역 주민 수는 5천 명 정도밖에 안된다. 관할구역 대부분이 논과 밭이고, 골프장과 시립 공원묘지 등이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띄엄띄엄 작은 동네들이 흩어져 있고, 그 동네들마다 예배당이 하나씩 들어서 있다. 

 

50년 넘게 공소로 있었던 팔봉의 신자들에게는 본당 승격이 대단히 큰 기쁨이었다. ‘선교’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긴 했지만, 어떻든 엄연한 본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200년 전 초대교회 신자들이 성직자를 기다리던 열망이 이와 비슷했을까? 칠도 벗겨지고, 낡고 초라한 목제 감실이지만 처음으로 그 안에 성체를 모시고 나서 감실등을 켜던 그 첫날의 감격과 기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 오래된 일본식 목조건물이 드디어 성당이 되었구나.’ 라는 기쁨 … 아마도 신자들의 기쁨은 당연히 나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부임하고 나서 첫 번째로 고민스러웠던 일은 교리교사를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일미사 참례자 70여 명 중에 어린이들 10여 명과 중,고등학생 대여섯명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 아이들만을 위한 미사를 따로 계획할 여유가 없었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주일 오후만 되면 어린이들과 함께 공을 차며 즐겁게 놀기만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전에 있던 본당에서 교리교사들이 자원봉사자로 매주 와주었고, 대림시기가 시작되면서부터는 3학년 이상 어린이들을 따로 모아서 첫영성체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성가대도 없었지만, 성가를 제대로 아는 신자도 별로 없어서, 전례해설자들을 위한 성가연습을 매주 한 차례씩 했는데, 노래 못하기로 소문난 내가 직접 오르간 건반을 짚어가며 성가를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작은 전자 오르간도 있었고,(비록 소리크기 조절이 잘 안되는 낡은 것이긴 해도) 반주를 하는 여중생도 있어서, 주일 공식미사는 제법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시골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킨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본당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부임 초부터 줄곧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것은, 본당신부로서의 일보다도 사무장으로서의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인수인계 때 넘겨받은 교적말고는 성사대장이나 기본적인 문서양식 한 장 없는 상태여서 일일이 새로 사야 했고, 각종 문서 작성법들을 다른 성당 사무원들에게 물어보고 배운 적도 많았다. 사무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왜 그리도 시시콜콜하게 많은지. 그 동안 수녀님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었던 전례 준비나 제의방 일도 직접 하려니까 만만치가 않았다. 하루 세 끼 쌀 씻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등등의 일은 오히려 쉬웠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밥은 전기밥솥이 해주었으니까.

 

보좌신부 생활을 하면서 거쳐왔던 본당들의 많은 신자들이 자취생활에 도움되라고 가전제품들을 기증해 주었다. 주교님 말씀대로 아무것도 없이 빈 몸으로 왔지만, 모든 것이 순식간에 갖추어져서 혼자 살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또 신문과 방송에 선교본당 이야기가 나가고 나서는 전국 각지에서 격려 전화와 후원금이 날아들기도 하였다. 미사주를 계속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분도 있었고, 연령회 비품을 마련해 준 신자도 있었다. 개인이나 단체에서 받은 후원금과 비품들, 그 액수에 관계없이 그들의 사랑과 정성이 우리 교회의 숨은 힘이고, 성령의 도움이라는 것을 느끼며 하느님께 감사한다. 

 

처음에 주교님께서 루가복음을 인용하면서 식량자루나 빵이나 돈은 다 놓고 떠나라고 하셨을 때는, 그래도 군인을 전쟁터에 보내려면 탄약은 주어야 하는것 아니냐고, 현대사회에서 사목활동하려면 최소한의 돈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속으로 투덜댄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교구에 어느 정도 보조비를 요구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정말, ‘부족한 것은 없었다’(루가 22,36).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비품을 구할 수 있도록 마음 착하고 열심인 신자들을 제때에 연결시켜 주셨다. 

 

이곳 신자들의 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시내 버스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곳이 많아서, 승합차가 한 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전주의 한 신자가 승합차를 기증해 주었다. 이제 그 차를 운전할 봉사자를 구해야 했는데, 그러기 전에 내가 운전 면허를 따야겠다고 생각해서, 운전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차를 갖기 싫어서 아예 운전면허를 따지 않던 고집을 꺾은 것인데, 마침 성당 가까이에 자동차 운전학원이 있었다. 그런데 새로 바뀐 면허시험 제도는 왜 그리도 시간을 많이 뺏어가는지. 넉달만에 겨우 면허시험을 모두 통과할 수 있었다. 면허시험도 시험이라고 합격을 기원하는 호박엿과 찹쌀떡을 사가지고 오던 신자들 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젠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던 때보다는 좀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임무가 본당 건물을 신축하거나, 단순히 교세를 확장하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차례 가정방문으로도 많은 냉담자가 성당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는 기쁨, 바로 그것, 하느님을 전하는 기쁨, 그 좋으신 하느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일이 내 주요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본당체제를 갖추는 준비 기간이었다면, 앞으로 2년 동안은 냉담자와 교우 가정 중의 비신자를 상대로 하는 선교 기간, 그 다음 2년은 모든 신자들을 선교사로 양성해서 본격적으로 선교에 나서는 기간으로 정해 두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지역에 알맞은 선교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가 새로운 고민거리이다. 

 

눈이 어두워 교리서를 읽을 수도 없고, 귀가 어두워 잘 듣지도 못하고, 몸이 불편해서 성당까지 오기도 힘에 겨운 노인들을 대상으로 6개월씩 예비신자 교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개신교 신자들을 천주교로 개종시키려고 덤벼들 수도 없는 일이다.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도 얼굴 마주치기가 힘들 정도로, 먹고사는 일에 쫓기는 고달픈 사람들에게 가두선교 방식의 선교활동은 적합하지 않고, 어떤 종파처럼 둘씩 짝지어 집집마다 방문한다고 해도, 낮엔 거의가 빈집이라 효과를 거둘 수 없을 뿐더러 생업에 바쁜 신자들에게 그렇게 돌아다닐 여유도 없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한 가지 길이 보였다. 매월 첫주일이면 미사 후에 함께 식사하는 국수잔치를 하고 있는데, 이런 나눔의 잔치가 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곳에는 동동주를 잘 담그는 신자들이 있어서 잔치가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어쩌면, 이런 잔치를 통해서 신앙의 기쁨이 더욱 깊어지고, 나눔과 초대의 즐거움 속에 저절로 선교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잔치를 즐기셨던 게 아닐까? 

 

인사이동 명령을 받을 때까지도, 나는 팔봉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처음 인사이동 소식을 들은 어떤 신자들은, 내가 아프리카 가봉 근처의 어떤 오지 같은 곳으로 선교활동 떠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팔봉이라는 낯선 지명과 선교본당이라는 들어보지 못한 용어 때문이었다. 이제는 고향처럼 친숙해졌지만, 구역이 너무 넓어서 내 담당구역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마을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가 한 명도 없는 곳이 많은데, 그런 곳이 모두 장차 ‘그물을 던져야 할 깊은 곳’이다. 

 

가정방문 때에, 주머니에 교패 한 움큼과 접착제 본드를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신자가정 집집마다 대문에 교패를 붙이고 다녔다. 대문에 교패가 없는 신자 가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개신교 목사님들이 “언제 이렇게 천주교 신자가 늘었나?” 하고 깜짝 놀랄거라며 함께 다닌 신자들과 웃기도 했다. 

 

병자 봉성체 때는 비신자 병자들도 방문해서 기도를 해주곤 한다. 전반적으로 고령화되어 있는 농촌지역인데도 의외로 병자는 그리 많지 않다. 

 

병석에 누워, 일 년에 한 번 정도나 신부 얼굴을 볼 수 있었던 한 할머니는 병자 봉성체를 갈 때마다, “지난 번에도 왔었는데, 또 왔네!” 하며 반가워하신다. 그 할머니는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신다. 그저 신부가 자주 찾아주는 것이 좋을 뿐이다. 

 

지금은 병자성사도 장례미사도 별로 없는 이 성당이, 몇 년 뒤에는 병자성사와 장례미사로 무척 바빠질 것이다. 

 

잠잘 곳이 없으면 텐트라도 치고 살겠다고 큰소리치며 부임한 것과는 달리 제법 그럴듯한 사제관에 필요한 것은 대충 갖추어놓고 사는 자취생활, 이젠 타본당 자원봉사자의 도움이 없어도 될 만큼 본당 교리교사도 세 명이나 있고, 매주일이면 미리 준비한 제병이 모자랄 정도로 영성체하는 신자가 늘고 있다. 지난 번 성탄 때 첫영성체한 어린이들을 교육하면, 지금은 두 명뿐인 복사단도 그 수가 많아질 것이다. 아이들에게 나중에 다른 본당 복사단과 축구시합을 하기로 약속도 하였다. 

 

하느님께서 이 보잘것없는 도구일 뿐인 나를 통해서 무슨 일을 얼마나 하실지 아직은 모른다. 또 앞으로 언제까지 더 이곳에 있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처음엔 혼자서 미사를 드려야 했던 월요일 새벽미사에 한 명씩 신자가 늘어 지금은 네 명이나 미사에 오듯이, 신자가 계속 늘어나서 언젠가는 더 큰 본당을 짓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몫이 아니다. 

 

나는 그저 사람들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하게 만들고자 할 뿐이다. 

 

지금 성당 대문 위에는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우리는 몹시 기뻤노라.”(시편 122,1) 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내가 사제서품 때 골랐던 성경구절인데, 선교본당의 표어로 삼고 싶기도 하다. 

 

나를 볼 때마다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는 선배 신부님들, 동료 신부님들, 그리고 멀리서 가까이서 많은 도움을 주고 기도해 주는 신자들 모두 정말 고맙다. 한국 천주교가 평신도의 힘으로 시작하고 발전했다는 것이 결코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선교본당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원은 역시 평신도이다. 

 

“누군 선교 안하나?” 

 

먼 미국 낯선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선교사들에 견준다면 대단히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늘 스스로 던지는 질책의 말을 오늘 또 다시 되뇌어본다.

 

[사목, 1998년 2월호, 송영진(전주교구 팔봉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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