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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부활의 영성: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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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17 ㅣ No.457

[부활의 영성]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사도신경에서 언급하듯,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부활하셨다고 고백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토요일의 신비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신 것에 대해, 당신 자신을 요나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태 12,40). 여기서 땅속이란, 히브리인들에게 죽음의 장소로, 죽음이란 어두운 땅속(셔올)에 내려감을 의미한다.

시편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읽을 수 있다. “당신께서는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는 구렁을 아니 보게 하십니다”(16,10). 바오로 사도도 이를 언급한다. “‘그분께서는 높은 데로 오르시어 포로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에페 4,8-9) 이런 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진실로 돌아가셨고, 죽음의 세상에 가셨다는 것을 그 당시 히브리 문화권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의 내세관

유다인들은 인간의 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나, 현세 이후의 세상에 대해 확실한 신학관이 없이, 그저 어두운 지하(셔올)에서 체재하며, 죽은 뒤에는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부터 부활에 관한 생각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에 계속되는 시련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을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죽은 이들에게, 죽음 후에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카베오기 하권에서, 그리스 신들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면서, 순교하는 일곱 아들 중 맏이가 숨을 거두면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7,9). 다니엘서에서는 개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 볼 수 있다.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12,2). (그 외에 구약에서는 에제 37장, 이사 26,19 등에서 부활에 대한 신앙을 읽을 수 있다.)

헌데, 이들에게 부활의 개념은 박해로 인한 시련 앞에서 하느님 심판에 대한 목마름에서 나온 것으로서, 영생은 옳은 일을 한 신앙인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수 동시대인에게, 아직 부활에 대한 신앙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에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분열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육화의 경험을 죽음까지

이런 종교적 배경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진실로 육체적으로 돌아가시고, 죽음의 장소까지 내려가셔서 3일 동안 죽음을 경험하셨다고 고백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죽음은 십자가에서의 육체적인 죽음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장소까지 내려가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경험을 하신 것을 의미한다.

탄생에서 시작된 육화의 신비를 인간 생후 차원까지 하셨다는 의미다. 곧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서 인간으로 모든 체험을 하시고, 또 저승까지 내려가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가 되시는 것이다.

성부께서 죽음의 장소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신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에, 부활은 죽음의 권세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묵시 1,17-18).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신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육으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심판을 받았지만, 영으로는 하느님처럼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1베드 3,18-20; 4,6).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는, 저승까지 내려가시어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가신 것이다. 곧 의로운 이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모든 영혼들, 곧 어두움 속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러 찾아가신 것이다.

이는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누구도 더 이상 죄의 권세에 묶여있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자비가 당신의 아들을 저승까지 내려보내시어,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게 하셨다. 이는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승리로서, 주님께서 통과하신 죽음의 문이 이제 사랑으로 생명으로 열린 문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저승의 문을 열고 땅속에 있는 모든 죄인을 상징하는 아담과 하와를 끄집어내시는 모습을 그린 정교회 부활 아이콘(76쪽)이 이 성토요일의 신비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또한 시리아 전례서에서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던 분이 셔올로 내려가셔서, 아담을 거기서 발견하셨다. 네 곁으로 내려와서 너를 네가 상속받아야 할 장소로 데려가고자 한다.” 이는 부활의 승리는 빈 무덤이 아닌, 저승에서 나타난 것임을 의미한다. 부활은 모든 형태의 죽음에 대한 승리로, 죽음의 말살을 의미한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죽음의 어둠에서 나와라!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죽음의 골짜기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땅속까지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이곳에서 나가자! 나는 너를 노예로 창조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너를 찾을 수 없었기에, 땅속 저승까지 왔다. 너를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고, 너를 찾아서 이곳까지 왔다”(4세기 팔레스티나 지방의 주교이자 신학자인 살라미스의 성 에피파니오의 성토요일 기도문의 일부).

어두움 속에서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고 계신다. “죽음과 맺은 너희의 계약은 파기되고 저승과 맺은 너희의 협약은 유지되지 못하리라”(이사 28,18). 그러니 아담의 자녀야, 어두움에서 나와라! 어서 일어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영원한 빛으로 나가자!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도, 온갖 이유로 주저하며 지옥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인간 심리가 있다. 고통 속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하여, 죽음의 골짜기에 남아있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지옥의 개념이 있다.

4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크리소스토모의 기도문처럼, 부활의 기쁨의 잔치에 우리 모두 초대되었다. 첫 번째 온 사람이나 마지막으로 온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부지런한 이나 게으른 이나, 단식을 한 사람이나 하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이 기쁨의 잔치에 초대받았다. 주님의 좋으심과 자비가 넘쳐흐르니, 이를 우리 모두 기뻐하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자신의 궁핍이나 잘못 때문에 울지 말 것이다. 용서가 무덤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순하게 주님의 생명의 말씀에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부활의 빛이 우리를 향해 비추고 있으니, 단순히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부활은 그 어떤 이유도, 우리를 하느님과 단절시킬 수 없다는, 죽음까지도 우리를 그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소식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기뻐하며 알렐루야를 노래하자!

* 김미정 아녜스 - 프랑스에 있는 성안드레아수녀회 수녀. 신학과정을 모두 프랑스에서 이수하고, 파리 예수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지금까지 전임교수로 일하면서, 문화와 종교분과 책임을 맡고 있다. 불어로 「조화와 죄」를 출판하였고, 불어로 여러 공동저서를 출간하였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2년마다 한 학기씩 강의를 하고 있다(kmjagnes@gmail.com).

[경향잡지, 2013년 5월호, 김미정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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