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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의 정의를 통해서 본 기도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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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3 ㅣ No.469

[영성의 샘] 기도의 정의를 통해서 본 기도의 특징


하느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

기도에 관한 수많은 정의들을 잘 살펴보면 기도를 이해하고 기도 생활을 해나가는 데 커다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고 한 기도의 대가,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묵상기도를 “자기가 하느님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하느님과 단둘이서 자주 이야기하며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자서전 8,4)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와 예로니모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 하였고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하느님과의 친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밖에 흔히들 기도를 하느님과의 만남, 사귐, 우정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정의들 가운데 공통적인 것은 하느님과 기도하는 사람 사이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가 바로 기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 남자와 여자, 아버지(어머니)와 자녀 사이, 친구들 사이의 관계처럼 아주 친밀한 사이로 표현하는 데에서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모든 특징들 (만남, 갈등, 대화, 사귐, 우정, 친교, 헌신, 하나 됨)이 기도의 정의에 담겨져 있고 실제로 기도의 순간에 일어납니다. 그러니 기도라는 것은 단지 기도하는 “나”만이 있는 순간도 아니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만이 계시는 순간도 아닙니다. 즉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나 청하고 싶은 바를 일방적으로 독백하는 자리가 아니며, 동시에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크신 사랑으로 나에게 이미 다가오신 하느님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열어 보이고 소통하면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순간입니다.

과연 사람들이 서로 자주 만나서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갈등의 순간도 있기 마련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싹트고 친밀함이 깊어지며 사랑하는 상대방의 뜻에 시나브로 자신을 맞추어 나가게 됩니다. 닮아갑니다. 특히 성경과 영성 서적들에서 비유로 자주 사용되는 신부와 신랑, 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면 하느님과 나와의 친밀한 사랑과 하나 됨(합일)을 더욱 극적이고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듯이, 신랑은 신부를 당신과 동등하게 만들 만큼 신부를 사랑하며, 신부는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하게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랑하는 남녀는 영원히 함께 지내기를 갈망하며, 온전히 하나가 되기 전에는 설레기도 애를 태우기도 하고 순간순간 짜릿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아이와 엄마의 관계로 비추어본 기도

하지만 기도에 있어서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시고 먼저 사랑하시며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가면서 자신의 미숙함과 관계 맺기의 서투름으로 시작되는 성장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점점 하느님의 사랑에 동화되어 가기에 엄마와 아이의 관계 안에서 쉽게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옹알이하는 어린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옹알거리지만 대개 엄마는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립니다. 처음에 아기는 엄마의 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지만 엄마가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끼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옹알거리면서 엄마에게 자신을 내어맡깁니다. 그렇다고 엄마는 쑥쑥 자라나는 아기가 원하고 보채는 대로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젖을 계속 달라고 보채지만 엄마는 아이의 성장을 위하여 조금 더 단단한 이유식을 먹입니다. 그래도 아이가 심하게 엄마 젖만을 고집하면 젖에 빨간 옥도정기를 바르기까지 하면서 이유기로 이끌어줍니다. 아이에게는 절망의 순간이지만 이유기를 지나면서 더 단단한 음식에 맛을 들이게 됩니다. 이제 조금 자라나서 옹알이가 구체적인 언어로 변화되었지만 아직 어린 아이는 주로 엄마에게 청하고 부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날로 자라나면서 아이는 자신의 의사표현을 정확히 하게 되고 엄마가 하는 말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알아듣게 됩니다. 이제는 엄마와 함께 대화 상대가 되어 이런 저런 말들과 표정을 통하여 자신의 느낌과 삶을 나눌 뿐만 아니라, 엄마의 얼굴 표정만 바라보아도 엄마의 생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사랑 덩어리 엄마를 닮아 있습니다.

기도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모르는 초심자는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해서 외우거나 어설프게 자신을 열어드리지만 하느님은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기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자신만 말하는 것 같고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가끔은 필요하다 싶어 달라고 청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듣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소통이 부족한지라 주로 필요한 것이나 원하는 바를 부탁드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충실하게 기도생활에 정진하다 보면 이제는 기도란 단순히 내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계속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자신을 내맡기는 순간임을 알게 됩니다. 무엇을 말씀드려야 하는지 알게 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점점 더 잘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제는 전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전보다 더 자신을 잘 드러내 보이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사랑과 뜻에 동화되어 갑니다.

이처럼 기도생활이 정상적으로 흘러간다면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그 뜻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다 보니 덕스러운 사람이 되어가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기도의 정의들에서 드러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만큼 그야말로 쌍방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일방적으로 독백하듯이 기도하거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은 채 하느님만 바라보려는 습관 때문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필요한 바를 청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응답하면서 자신을 헌신하는 순간입니다.


기도는 주문이 아니다

기도가 상호 친밀한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망각할 때 우리의 기도는 마치 주문(呪文)처럼 되어갈 수도 있습니다. 주문은 주문을 외우는 자가 일방적으로 정해진 구절의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달달 외움으로써 이에 걸맞은 효과나 효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문에는, 정상적인 기도와는 달리, 인격적인 만남도 대화도 친교도 헌신도 사랑스러운 관계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함으로써 내가 하느님의 마음과 생각을 바꿔놓는 데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자와 닮아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쌍백합, 제22호, 2008년 가을호,
김성봉 신부(줄포 선교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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