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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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3 ㅣ No.1114

[순교자의 숨결] 이순이 루갈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홀로 계신 어머니께 머리 숙여 글을 올립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도 없는 다급한 때를 당해 어머니께 제 심정을 아뢰려 하옵니다. 다 아뢸 수는 없사오나, 제 손으로 몇 자 적어 올려 어머니 곁을 떠나 4년 동안 지내온 심정을 말씀드리옵니다.

어머니, 비록 제가 죽게 되더라도 너무 마음 상해하시다가 주님께서 정말 특별히 베풀어주신 은혜로운 분부를 거스르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 뜻을 따르셔요. 다행히 제가 주님께 저버림을 당하지 않는 은혜를 받게 되거든 주님 은혜에 감사드리셔요.

길지도 않은 한평생, 참으로 변변하지 못한 자식이었고 못난 자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순교의 열매를 맺는 날이면, 어머니께서도 자랑스러운 자식을 두었다고 여기실 것이고, 저 또한 어머니의 떳떳한 자식이 될 것입니다.

순교는, 부족하고 못난 자식을 참되고 보배로운 자식이 되게 하는 것이에요. 어머니, 간절히 바라오니, 제발 너무 마음 상하지 마시고 마음 다잡으셔서 슬픔을 억누르셔요. 이 세상을 꿈같이 여기시고, 하늘나라를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고향으로 아셔서 조심조심하여 주님 뜻에 따르셔요. 이 세상 삶을 다 마치시면, 못난 자식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영광을 받아, 가이없이 행복한 모습으로 손을 마주잡고 하늘나라로 모셔들여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렵니다.

소식을 들으니, 오라버니(이경도)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 하던데,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주님의 도우심인가요!

주님께 우러러 이루 다 감사드릴 수 없고, 어머니의 복을 찬송합니다.

경이 형제(이경중, 이경언)와 큰언니, 올케언니에게 의지하시고, 우리 남매(이경도, 이순이)는 생각하지 마셔요.

충주댁(이경중 아내)을 아무쪼록 하루 빨리 데려다가 함께 지내셔요.

어머니 곁을 떠난 지 4년에 이 지경을 당하여 그동안의 심정을 다 아뢰지 못하니 그지없이 애달픈 제 마음이야 오죽하겠어요? 이 모두가 주님 뜻이에요. 우리를 세상에 나게 하심도 주님 뜻이요,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도 주님 뜻이니, 죽고 삶에 얽매이는 것은 도리어 웃음을 살 일이옵니다.

어머니, 엎드려 정말 간절히 바라오니, 제발 마음을 너그러이 가지시고 자식 잃은 슬픔을 이겨내셔요. 하늘나라에서 우리 모녀의 정을 다시 이어 영원히 함께 살아요.

올케 언니, 너무 서러워 마셔요. 오라버니가 비록 돌아가시더라도 언니는 정말 남편다운 남편을 두었다는 말을 들을 테니까요.

저는 언니가 순교자의 아내가 되심을 정말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이 잠깐 세상에서 부부가 되었다가, 하늘나라에서는 성인의 자리에 올라 모자, 형제, 남매, 부부가 끝없이 즐거운 삶을 누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죽은 후에도 전주 시댁과 소식을 끊지 마시고, 저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해 주셔요.

전주로 시집 온 후, 그 전부터 항상 근심하던 일을 이루었어요. 9월에 시댁에 와서 10월에 우리 두 사람은 동정(童貞)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4년을 오누이처럼 지냈습니다. 그런 중에 육체적인 유혹을 근 십여 차례 받아 하마터면 동정서약을 깰 뻔했어요. 그 때마다 저희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통과, 피를 흘리신 사랑에 의지하여 무사히 그 유혹을 이겨내었답니다.

제 사정을 몰라 답답하게 여기실 것 같아 이 일을 말씀 드리는 것이니, 이 편지를 살아 있는 저 보듯이 반겨 주셔요.

제가 순교의 열매를 맺기도 전에 이렇게 붓을 드는 것이 정말 경솔한 짓입니다. 어머니께 제 걱정을 풀어 드리고 마음놓으시게 하려는 것이오니 이 편지로 위로를 삼으셔요.

주 야고보(주문모) 신부님께서 살아 계실 적에, 친정과 시댁이 겪는 고난을 자세히 기록하여 두라 하셨습니다. 감옥에 들어온 후 시동생 요한(유문석)편에 기록한 글을 보내드렸는데 어찌 하셨는지요?

어머니, 정말 간절히 바라고 바라오니, 제발 마음을 너그러이 가지시고 자식 잃은 슬픔을 이겨내셔요. 이 세상은 헛되고 거짓된 세상으로 생각하셔요.

드릴 말씀은 한도 끝도 없지만, 이 편지로는 다 아뢸 수 없으니 대강 이만 아룁니다.

신유 구월 스무이렛날 딸이 머리 숙여 글을 올립니다.

[쌍백합, 제17호, 2007년 가을호 ; ‘이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김진소 편저 / 양희찬 ? 변주승 옮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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