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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의 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사목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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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2 ㅣ No.467

[신앙의 해 특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15)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이번 호부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중요하고도 독창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는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이하 사목헌장)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헌장은 교회헌장과 더불어 공의회의 가장 뜻 깊은 결실이며, 또한 의외의 수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공의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아무도 사목헌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와 같은 문헌이 초안에 포함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스스로가 이 문헌을 만들어 내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현대인들

사목헌장은 바로 이 말,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현대인들”이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이전에 교회가 인간 세상에 대해 무엇이든 가르치려 할 때에는 늘 원칙에서 출발해서 구체적인 답을 내는 이른바 ‘연역적’ 방법을 택하였었습니다. 하지만 사목헌장은 현대인이 처한 상황에서부터 시작하는 ‘귀납적’ 방법으로 가르침을 펴고 있습니다. 1960년대, 사람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의 공포를 겪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달나라에 사람을 보내려고 하는 시대였으며, 동시에 인간의 어리석음과 비참함에 절망하는 시대였습니다. 현대인들은 과연 인간의 존엄이 있는가, 있다면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목헌장이 제시하는 인간 존엄의 근원은 ‘계시’입니다. 우리가 이미 계시헌장을 들여다보면서 공부한 대로, 하느님 계시의 정점이자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공의회는 사람이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으며, 인간 존엄성의 근원도 하느님 계시 안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님을 통한 창조와 구원 안에 인간의 존엄이 있고 인간 세상의 문제들이 그 안에서 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이자 예수님의 형제

사목헌장은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신 하느님 홀로 이러한 문제에 완전한 해답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들 안에서 계시를 통하여 그 해답을 주신다.”(41항)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닮게 창조된 사람은 그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죄를 빼고는 인생살이의 모든 조건들을 다 받아들이셨으며, 우리 사람을 벗이라고 부르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은 존귀합니다.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도 그 사람은 예수님의 형제이며,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체입니다. [2013년 6월 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대구주보 3면,
문화홍보실]


[신앙의 해 특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16)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인간의 존엄을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님 안에서 찾은 공의회의 교부들은 인간이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사목헌장이 가르치는 사람살이의 근본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사람도 혼자 살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만, 하느님께서 사람을 공동체로 창조하셨고 또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구원받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인간

사목헌장 24항은 인간 소명의 공동체적 특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목헌장이 말하는 인간의 사회성은 단순한 사회학적 공리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넣어주신 본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때에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시고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창세 2,18)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처럼 사람도 서로 만나고 나누면서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이 삼위일체의 사랑, 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주는 사랑을 체험하고 또 실천함으로써 완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사목헌장 32항).


서로 달라도 사랑할 수 있다

이어서 사목헌장은, 더불어 살도록 창조된 사람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 소명을 실현할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는 다양한 외모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서로 생각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같지 않은데, 무엇을 기준으로 함께 살 수 있을까요? 사목헌장이 제시하는 기준은 ‘공동선‘입니다(26항). 이 ‘공동선’은 단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볼 때에만 인류가 한 가족이며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 존중 사상은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이웃을 어떠한 예외도 없이 또 하나의 자신으로 여겨야”(27항) 한다는 가르침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겉모습과 사고방식이 달라도, 하느님을 부모로 모시고 예수님을 맏형으로 둔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고 함께 바람직한 것을 추구할 수 있으며, “참으로 친절과 사랑으로 … 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8항).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치는 사회정의의 바탕입니다. [2013년 6월 9일 연중 제10주일 대구주보 3면,
문화홍보실]


[신앙의 해 특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17)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사목헌장이 인간의 존엄과 본성의 뿌리가 삼위일체 하느님께 있다고 천명한 것을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께 사랑받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 났기 때문에 귀한 존재이며, 더불어 살면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것은 죄를 제외한 사람됨의 모든 면이 가치가 있고 귀한 것임을 밝혀 줍니다. 사람의 지식과 연구, 노동과 문화는 무의미한 것이거나 신앙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빛을 받아 더욱 뜻 깊은 것으로 변모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활동에 의미가 있는가?

사목헌장은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 즉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급속하게 변화 발전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 활동’, ‘인간 노력’의 의미에 대해 고찰합니다(33항). 사목헌장은 인간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 자체가 하느님 계획에 부합한다고 가르치며, 이성과 신앙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천명합니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징표이며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의 결실”이기에 “인간의 능력이 커질수록 … 인간의 책임도 더욱 확대”된다고 말합니다(34항). 사람이 하는 모든 활동은 ‘인간 완성’을 향한 도구여야 하며, 세속 지식과 사물의 발전도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에 따라 영원한 목적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지능을 주신 하느님께서 계명과 양심도 주셨다

공의회는 ‘현세 사물의 자율성’이란 말을 통해 신앙과 직접 관련이 없는 과학 지식이나 문화와 같은 것들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율성’은 사람이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주물러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자력을 발견한 인간의 연구는 가치 있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살인하는 데 쓴다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상에서 벌이는 온갖 활동이 하느님 앞에 올바른 것이 되려면 은총의 도우심과 죄의 유혹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37항). 이 노력을 위한 기준은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인간완성과 세계개혁의 근본 법칙”입니다(38항). [2013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일 대구주보 3면,
문화홍보실]


[신앙의 해 특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18) 예수님이 우리 동네에 오실 수 있도록


사목헌장은 인간의 정체와 존엄성, 그리고 인간의 활동과 그 의미를 다루고 난 후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들여다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 속을 여행하고 있는 교회는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건물이나 기관을 의미하기 보다는 앞서 교회헌장을 공부하면서 배운 대로 무엇보다 먼저 ‘성사’,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도구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누구인가

하느님을 공경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앙에 적대적인 이 세상,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보여 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곧 구원의 성사 노릇을 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신자들, 즉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도 많고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지체이고, 예수님의 살이 우리 살에 섞여 있으며 우리 혈관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가는 곳에 손발이 따라간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사람이 되신 하느님, 즉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능력이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회개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동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여기저기를 다니시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하시기 위한 도구로 선택하셔서 우리 몸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 정신에 당신의 말씀을 새겨 주십니다. 우리가 잡아주는 손, 우리가 입을 열어 하는 말을 통해 우리 주변의 여러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이나 강요가 아닌 사랑의 대화

교회는 이 세상에 ‘누룩’과 같은 존재, ‘영혼’과 같은 존재입니다.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도록 일깨우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도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택하신 방법을 따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러 오지 않으셨고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셨으며 죄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당신의 몸을 헤쳐 사람들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지금 사람들을 먹일 예수님의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예수님의 몸입니까? [2013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대구주보 3면,
문화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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