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프랑스 순례: 레사크도드 -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따라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4 ㅣ No.1097

[영원을 향하여 시간을 걷다 - 프랑스 순례] 레사크도드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취를 따라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년)는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선종했다.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대목구로 창설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조선 전교를 자청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그러나 주교는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조선을 향해 오다가 뇌내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모방 신부가 그의 장례를 치렀는데, 1931년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전교 100주년을 맞아 유해를 서울로 모시고 와 용산 성직자묘역에 안치했다.

그가 태어난 레사크도드(Raissac-d’Aude)는 프랑스의 21개 레지옹 가운데 랑그도크루시용에 속하는 곳으로, 13세기에 맹위를 떨쳤던 ‘카타리파의 마을’이었다.

이원론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이단 카타리파가 불길처럼 번지는 것을 막고자 도미니코 성인까지 나섰으나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었다. 교회가 카타리파 툴루즈 백작을 파문하자 그 보복으로 교황 특사가 피살되었고, 교황은 ‘알비주아 십자군’ 출정을 요청하는 칙서를 내려 이단의 근원인 랑그도크의 ‘모든 사람’을 토벌하라고 명한 것이다.

1209년에서 1255년까지 계속된 이 작전에서 알비주아 십자군은 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무고한 랑그도크 주민이었다고 한다. 과연 그때 ‘죽어 마땅했던’ 사람은 몇이나 되었을까. 글도 제대로 몰랐던 사람들, 그들이 정통 신앙이 뭔지 이단이 뭔지 알기나 했겠는가.

어찌 됐든 카타리파는 궤멸되었고 랑그도크 지방에는 아비규환의 기억만 남았다. 참혹한 학살의 기억이 뼛속까지 사무쳐서 가톨릭교회와는 줄곧 불화를 겪었고 상대적으로 개신교의 영향이 컸다는 랑그도크루시용, 그 중심에 오늘 가게 되는 카르카손이 있었다. 이곳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라고 우리나라를 향해 온 것이었다.

차창 밖으로 ‘엠마우스’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이 스쳐갔다. 해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으로 뽑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아베 피에르 신부가 창설한 그 단체였다. 레지스탕스이자 사제이자 국회의원이기도 했던 피에르 신부.

자신은 정치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혀 좋은 일에 나서게 하는 한 마리 ‘벼룩’일 뿐이라던 아베 피에르. ‘아베 피에르’라는 암호가 필요했던 레지스탕스 시절처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평생 애초의 암호명으로 살다 간 그와, 자신들의 양심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하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프랑스 사람들, 이것이 또한 프랑스의 힘 아닐까 생각했다.

간간이 비가 내리는 브뤼기에르 주교 생가 마을 입구에 신자 분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생가는 옛 모습이 아니라 변해있었지만, 이백여 년 전 이곳에서 태어나 우리 교회의 초석이 된 한 사람을 기억하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9세기경에 지어진 레사크 성당이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세례를 받은 이 단출한 성당에는 독특하게도 참 많은 성상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과 안토니오와 잔 다르크와 야고보와 예수님이 함께 만나 담소를 나누는 듯한 성당이었다.

제대를 둘러싼 반원형 벽에는 양쪽에 다른 모습의 성모상이 있었는데, 도움이신 마리아가 계신 반대쪽엔 특이하게 소년 예수님을 앞에 세운 성모상이 있었다. 그렇게 사방의 성인들과 그곳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다.

주민들이 준비한 다과상에서 부드러운 장밋빛 로제 한 잔을 바삐 ‘부었더니’ 몸이 아주 따뜻해졌다. 카르카손으로 가는 길에, 멈췄던 비가 다시 한두 방울 뿌리고 있었다. 푸른 생명력이 그득한 들녘이었다. 그러다 비가 느닷없이 거칠게 쏟아졌다. 그 시절, 한꺼번에 살육을 당한 사람들의 눈물 같은, 한숨 같은. 어쩌면 지독하게 순결했던 맹신의 한숨 같은 빗줄기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카르카손에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다니고, 1815년 생 미셸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 대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리고 182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생 미셸 성당은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시테 성으로 향했다(112쪽 사진). 카르카손은 유럽에서도 가장 크고 잘 보존된 요새도시여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52개의 탑과 원뿔형지붕이 이루어내는 앙상블이 언뜻 동화 속 성 같은 느낌이기도 하지만 이곳 역시 사람들의 애증과 애환의 장소였다. 성 입구의 여인인 마담 카르카스 조형물도 이 성의 전설 같은 사연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시테의 중심에 있는 생 나제르 대성당은 혁명 전까지 카르카손 주교좌성당이었다. 어두컴컴한 성당 안에서는 줄곧 크고 작은 공연들이 이어지고 있어서 갈 길 바쁜 순례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젊은 커플들이 성당에 자리 잡고 앉아서 연주되는 음악에 귀 기울이는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순례 내내 젊은 부부가 어린아이들과 함께 성당을 찾은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들이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꽤 반갑고 좋아 보였다.

어린아이까지 자기 배낭을 메고 함께 여행 중인 젊은 가족, 데이트를 하거나 홀로 산책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 밖으로 펼쳐진 포도밭과 고즈넉한 집들, 오랜 역사를 뒤로하고 그저 피어있는 풀과 어마어마한 두께의 성벽 틈에 자라는 야생화. 비는 멎었지만 여전히 흐릿한 카르카손의 잠시, 시간이 그렇게 안갯빛으로 저물고 있었다.



* 이선미 로사 -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신자.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 성지를 순례하다 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글 · 사진 이선미]


1,16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