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 (금)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강론자료

2015-0104.....공현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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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1-03 ㅣ No.1672

 

주님의 공현 대축일(가나다해)

이사야 60,1-6      에페소 3,2-3.5-6      마태오 2,1-12

2015 1. 4. (주일). 이태원

주제 : 공현을 대하는 나의 자세

오늘은 공현대축일입니다. 공현(空弦)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모습이 가족을 벗어난 다른 사람들에게도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전례에서 구별한다면, 예수님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드러났다는 얘기이고,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말하는 축제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이 페르시아인이라는 것은 거의 정해진 표현이고,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의미가 있기에 우리는 오늘을 축제일로 정하고 공현이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기쁜 일의 시작이었지만, 그 상황을 전하는 마태오복음서에는 기쁜 내용만 있지는 않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왔다는 천문학자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거치는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새로운 위험이 준비되고 있었고, 실제로(?) 그 위험한 일 때문에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을 거치지 않고 자기들 나라로 돌아갔다고 전합니다.

 

세상에 태어나고도 이렇게 복이 없는 운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으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타도(打倒)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 일이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찾기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굳이 본보기를 찾으려고 한다면, 사극(史劇)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을 다시 역설적으로 설명다면, 헤로데가 보여준 극적인 행동 때문에 예수님은 아주 특별하고도 특수한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태어난 분이라고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우리가 가질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세상이 갑작스레 변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옳겠느냐는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을 설명하다보니, 결론이 먼저 나온 모습이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천문학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먼저 찾아간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정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들이 세상을 대하던 태도도 요즘 사람들이 드러내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표성을 띤 사람은 왕궁이나 고귀한 가문의 사람이고 그는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에서 태어나고 자라야 한다는 속설(俗說)을 간직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판단하고 그렇게 산아도,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가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 똑같이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러할 때, 올바로 사는 모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헤로데는 사전에 나옴직한 전형적(典型的)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마태오복음사가는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에서 헤로데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고, 그가 보여준 모습과 얼마나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동방에서 천문학자들이 도착하고, 놀라운 일이 실현될 곳은 베들레헴이라는 장소를 알게 된 헤로데는 함께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동방에서 온 천문학박사(?)들을 보내면서 천연덕스럽게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서 우리가 상황을 제대로 알려면 어떤 지혜가 필요하겠습니까? 사람은 하도 머리가 좋아서, 숨기려고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숨길 수 있다고 말하고 모든 것을 다 숨겼다고 말합니다. 동생을 죽이는 못된 일을 하고서도 자기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하느님을 향하여, 카인이 천연덕스럽게 말한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4,9)”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순간에 내 눈으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볼 수도 없고, 우리의 귀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라고 신앙에서는 말해주지만,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인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민족에게 하느님께서 오시는 일의 의미를 말한 이사야예언자의 말씀은 2500년 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고,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소리일까요? 하느님께서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우리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날, 미리 준비한 자세로 대할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가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실망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희망을 갖고 그 일을 대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공현을 기념하는 축일,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대하게 되는 날 우리는 과연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행동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그 대답은 남이나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도록 다짐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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