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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가정과 여성: 가족 되기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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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6-04 ㅣ No.621

[경향 돋보기 - 가정과 여성] ‘가족 되기’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영성


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하며 실제로 가족을 해체하지만 그와는 달리 또 다른 많은 사람이 여전히 가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의 가족제도를 비판하며 ‘열린 가족’ ‘불량 가족’ ‘가족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떠올리면서도 여전히 ‘가족’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일까?


우리에게 가족이란 …


이전에 익숙했던 개념들이 더 이상 현대인의 가족관에 적합하지 않기도 하고 이제껏 가족을 설명하던 많은 개념이 새로운 가족 형태, 현대인의 생활 감정, 삶의 현실을 적절하게 묘사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거나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시 묻고 싶은 질문,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주민등록 또는 호적에 같이 올라있는 사람? 한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며 한 집에 사는 사람? 가장 아쉬울 때 찾게 되는 사람? 절대적인 내 편?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긍정적 힘을 주는 사람? 생애 최고의 축복받은 선물? 마음이 맞는 사람? 어느 소설에서처럼 발가락이 닮은 사람? 그것도 아님 방귀 트는 사이? 아니, 가족이란 이 가운데 어느 것 ‘이기(being)’가 아니라 이러한 것들로 ‘되기(becoming)’의 과정일 게다.


가족이기? 가족 되기!

많은 사람들이 여성이면 자연스레 엄마가 되고 남성이면 자연스레 아빠가 되며 사람들은 누구나 본래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저절로 자녀가 된다고 여긴다. 생후 한 시간 이내에 엄마의 젖꼭지를 찾아 스스로 빨기 시작한다는 연구 결과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성의 경우에 더욱더 만연하다. 새끼를 보호하려고 맹렬하게 행동하는 어미 쥐, 수유할 때 평소보다 세 배의 열량을 뺏겨 체중이 10퍼센트 이상 줄어든다는 어미 개, 새끼가 무리에 어울릴 수 있을 때까지 품고 다니는 캥거루나 영장류들의 이야기들은 인간 어머니에 유비되면서 모성 본능의 실체를 단단히 한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 자녀, 모성 등을 생물학적인 특성으로 환원하는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은 우리가 엄마 되기, 아빠 되기, 아내 되기, 남편 되기, 자녀 되기의 사회적 맥락이나 윤리적 측면을 간과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특성상 아기 생명 보존의 능력이 여성보다 훨씬 덜한 남성들을 영원히 아이 양육에 불필요한 존재이거나 양육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으로 내던져 두게 한다.

사실 인간은 생물학적 특성 이상의 존재이다. 출산한 엄마의 몸은 아기를 위해서 젖 먹일 준비태세를 갖추지만 모든 엄마가 다 자연스레 수유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수유를 위해서는 생물학적인 몸의 변화에 따른 엄마의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아이가 배고픔을 호소할 때마다 수유를 할까, 시간을 정해놓고 할까, 아이가 원하는 시기까지 해야 할까, 시간적 제한을 두고 수유를 해야 할까 등의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분명 생물학적인 것을 넘어선 사회적 영역의 것이며, 아이를 낳은 여성이면 자연스레 ‘엄마임’이 아니라 ‘엄마 되기’의 과정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빠 되기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남편은 저절로 아빠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의 과정을 통해 아빠가 된다. 생물학적 특성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많은 남성이 엄마와 아이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거나 서운해한다. 그래서 아빠가 되기를 포기하고 아빠이기에 그친다. 엄마 되기와 마찬가지로 아빠 되기 역시 새로 태어난 아이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에 참여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빠이기에 그치는 남성들도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턱받이에 얼룩이 묻는 정도나 바닥에 음식이 떨어지는 것 등에는 관심 두지 않는다. 아내가 부탁했으니까 또는 아이가 원하니까 음식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이는 아빠 되기를 하는 남성이 어떻게 하면 턱받이에 음식을 묻히지 않고 좀 더 잘 먹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유쾌하게 아이의 용변 시중을 들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러한 되기의 과정은 부부관계에서 특히 더 필요하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만나서 생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관계야말로 그저 사랑해서 결혼하니 부부인 것이 아니라 부부가 되어야 한다.

1992년에 출간된 존 그레이의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원래 서로 다른 행성 출신인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 서로의 말에 오해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여성의 언어와 남성의 언어의 차이가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이혼 직전에 놓인 부부들을 상당수 구제했다는 선전은 부부 되기의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책의 효과는 단지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는 가설 자체가 아니라,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들의 다름이 서로 이해될 수 있는 차원을 보여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가족 되기’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영성

부모이기, 자녀이기, 부부이기가 아니라 엄마 되기, 아빠 되기, 자녀 되기, 부부 되기 등이 가족 되기의 구체적 과정이라고 할 때 이들의 여정에는 무엇이 놓여있어야 할까? 특히 가족 되기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영성은 어떻게 마련되어야 할까?

그것은 가족 되기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을 넘어서려고 하느님의 은혜와 섭리에 따른 보살핌에 의지하면서, 그 보살핌을 가족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는 가운데 마련된다. 또한 의식적으로 가족 되기의 과정을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가운데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과정들은 다음의 세 가지 여정으로 펼쳐진다.

하나. 서로 보살핌의 실천

우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 보살핌의 관계에 있음을 떠올리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내가 힘든데 저 사람은? 내가 배고픈데 저 사람은? 내가 기분 나쁜데 저 사람은?’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내가 남의 자리에 앉아보는 방법, 내 자리에 남을 앉혀보는 방법을 통해서 다가설 수 있다. 부모는 자녀의 입장에서, 자녀는 부모의 입장에서,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서,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성경은 자녀들을 찬미할 뿐만 아니라 자녀를 둔 이들을 칭송한다.

“보라, 아들들은 주님의 선물이요, 몸의 소생은 그분의 상급이다. 젊어서 얻은 아들들은 전사의 손에 들린 화살들 같구나. 행복하여라, 제 화살통을 그들로 채운 사람! 성문에서 적들과 말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시편 127,3-5).

시편의 이 말씀은 자녀를 하느님이 주신 복으로 말함으로써 자녀가 지니는 의미와 부모 역할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부모 되기의 영성이 어떠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그러기에 부모 된 이는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자녀들을 저에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 되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편함과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불평하는 태도, 자녀를 돌보는 일의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시며 만족과 기쁨을 채워주옵소서.”

서로 보살핌은 또한 부부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다. 에페소서에서 보여주는 아내 되기와 남편 되기를 위한 구절을 조금 바꾸어서 이해해 보자.

“아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십시오. 남편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에페 5,21-2.25.29 참조).

둘. 소통을 위한 실천적 영성

가족 되기에서 중요한 요소는 가족 구성원의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가족 구성원이 어느 한쪽 방향으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차이들이 인정되고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소통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차이, 다름, 특수성이지 동일화나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가족 안에서 원활한 소통은 말하기와 듣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소통에서 ‘말할 수 있음’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말할 수 있음이란 행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세계에 기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 공동체 안에서 부모가, 자녀가, 아내가, 남편이 말할 수 있는 주체이어야 함은 가족 되기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할 수 있는 이만이 유의미한 세계 경험의 주인으로 세계에 현상할 수 있으며, 역으로 말할 수 없는 이는 경험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간에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늘 강조되지만 가족 모두가 말하기와 듣기의 윤리에 입각해서 대화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오늘 하루 어땠어?”라는 물음에 “괜찮았어.”라고 답하는 형식적인 대화를 한다.

오늘부터는 물음을 이렇게 바꾸어보자. “오늘 하루 어땠어?”에서 그치지 말고, “그 중에서 가장 좋았던 일은 뭐였어?” “가장 안 좋았던 일은 또 뭐였어?” 등등으로. 사실 말하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결국 ‘들리도록 말하기’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말하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말하지 못하는, 들으려는 노력이 포기됨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들으려는 노력이 포기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화와 소통은 그저 말하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말을 듣겠다고 결정할 때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셋. 가족의 범위를 확장하는 실천적 영성

혈연가족에 대한 사랑을 유달리 강조한다. 공자는 혈연관계 특히 부모자녀의 관계를 그 어떤 다른 인간관계보다도 가까운 사이라고 말한다.

“섭공이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친 것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 정직한 사람이란 그와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는 그 가운데 정직함이 있습니다.’”(「논어」, 자로).

혈연애를 강조하는 공자에게는 정직함의 의미도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다.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숨겨주고 싶은 감정에 솔직한 것이 진정한 정직함이라고 한다. 자식은 부모가 한 행동의 맞고 틀림을 문제 삼지 않으며 상호관계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요지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부모 자녀 관계 또는 혈연관계에 있어야 함을 전제하는 공자의 생각은 본의와는 달리 현실 속에서 폭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부모 자녀 관계 또는 혈연관계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대다수 사람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없고 어떤 사람은 어머니가 없으며 또 다른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없다.

이렇게 보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혈연가족에 대한 사랑이 모든 인간관계를 잘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규정짓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또 혈연가족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것은 배제와 분리의 문화를 낳을 수 있다. 내 가족, 내 부모, 내 아이를 강조함으로써 남의 가족, 남의 부모, 남의 아이를 무시하게 되는 경향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제시해 주는 확장된 가족의 범주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마르 3,31-35 참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성인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마태 19,4-6; 마르 10,6-9)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자칫 혈연가족으로만 그 사랑이 제한될 것을 우려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면 그저 가족임이 아니라 가족 되기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따라서 단지 혈연가족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더 먼 데까지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5월, 가정의 달에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은 그저 ‘가족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되기’를 위한 실천적 영성을 키우는 것, 그리고 그것을 혈연가족 안에 가두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남의 가족, 사회적 약자, 주변인, 소외된 이들까지도 돌보는 확장된 가족 되기의 영성 훈련이어야 할 것이다.

* 김세서리아 체칠리아 -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5월호, 김세서리아 체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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