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강론자료

2013-0526...삼위일체대축일...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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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3-05-25 ㅣ No.1356

삼위일체 대축일 (다해)

잠언 8,22-31        로마 5,1-5          요한 16,12-15

2013. 5. 26. 등촌3

주제 : 삼위(三位)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오늘은 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가운데, 인간이 알아듣기가 어려운, 하느님의 신비를 공경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확실하게 알아듣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가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우리 삶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고, 우리의 행동도 달라질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알아듣고 설명하려는 하느님의 속성(屬性) 즉 하느님의 특징이나 성질을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세상에 있는 존재들 가운데는 사람만큼 뛰어나거나 지혜가 있는 사물이 없기에, 사람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는 합니다만, 애석하게도 신앙에서 가르쳐주는 하느님의 속성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의 지혜를 넘습니다. 다시 말해서, 뛰어나다고 말하는 인간의 이해력만으로는 하느님의 속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신학과 신앙에서는 그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놀라운 개념인 계시(啓示)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계시는 하느님께서 알려주셔야만 인간이 그 내용을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하느님 자신에 관한 속성이나 성격에 대한 설명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지혜나 지식추구의 자세만으로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삼위일체(三位一體,=②⦗성부인 하느님과 성자인 예수와 성령(聖靈)을 동일한 신격(神格)으로 여기는 교의(敎義))에 대한 설명은 주보8쪽의 오른쪽 설명에 쓴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몸이요, 다른 위격이라고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신비인, 계시에 관한 설명은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려고 해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신비요, 하느님의 속성이요, 하느님께서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계시내용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잠시 접어두고, 우리가 삼위일체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사는 자세와 삼위일체 신비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산다고 할 때, 드러낼 수 있는 자세를 구별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대신하겠습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신앙에서 하느님으로 알아듣고 말하고 이름을 부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몸이요, 다른 위격이라는 뜻인데,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드러내는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온전히 체험하고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들보다 더 큰 은총을 받아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말하고, 신앙의 증언을 말하는 사람도 결국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것만큼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안타까움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갖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을 한 몸이요, 다른 위격인 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드러나는 하느님이 세상의 사물을 대하는 자세는 같은 목적을 지녔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편을 사용하는 분이라고 설명을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성부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창조와 성자께서 이루신 일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구원, 그리고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고 교회공동체가 설명하는 일치를 위한 노력은 모두 다 인간을 위한 행위들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을 위해서 하느님은 모든 것을 꾸미셨고, 그 인간을 구원할 목적으로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다르게 알아듣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몸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느님도 아니고 서로 등급이 있는 다른 분이라고 알아듣는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경쟁과 대립, 파괴와 분열, 자기 자랑과 자기 이름만 드높이려고 못할 일도 없고 그런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세상의 모습과 같은 하느님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사람을 뛰어넘는 엄청난 분을 설명할 때에 그런 표현이 함께 할 수도 없는데, 우리는 논리상의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속성을 사랑과 일치가 아니라, 경쟁과 대립, 파괴와 분열을 우선으로 바라보면, 창조주 하느님은 구원자이신 아들 성자를 죽음에 붙이고 무책임한 아주 이상한 하느님이 되고, 성자는 자신이 세상의 구원을 이룩했다고 가르치면서도 결국 자기 자신은 파멸된 성공하지 못한 구원자 하느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 하느님의 힘을 드러낸다는 성령의 활동은 뭔가 뛰어난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 아무런 영향이나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종이호랑이 하느님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보에도 설명한 것처럼, 사람이 알아듣는 삼위일체의 신앙교리가 형성되기 전에, 성령의 존재를 성부와 성자에 예속된 등급이 낮은 존재로 보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054년에는 그리스정교회와 분열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의 관계를 경쟁과 대립, 파괴와 분열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기만하는 가짜 그리스도의 이론인 가현설(假現設,=물질은 본래 악()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적인 육체와 결합할 수 없으며 다만 겉으로만 육체의 형태를 취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론. 대표적으로 그노시스파(gnosis)와 카타리파(Cathari)가 주장함)의 이론이 생길 수밖에 없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혼동하게 되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은 성부라는 성부수난설의 잘못된 이론도 나오게 됩니다.

 

또한 그런 이론과 자세에서 요즘 세상에 등장하는 이론들처럼, ‘세상의 창조주 하느님을 거부하게 되고, 인간이 만물의 최고 존재라고 하면서도 파괴와 분열을 일삼으며 내 목적에 따라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계시의 내용과 다른 이론을 갖고 살게 되면, 앞으로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올바른 신앙을 위해서도 기도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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