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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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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땀의 순교자 최양업3: 조선 5개도를 본당사목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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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11 ㅣ No.921

[창간 23돌 특별기획] 제1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 (3) 조선 5개도를 본당사목구로


'길의 사도' 최양업, 조선 5개도를 두루 다니다

 

 

1850년 1월. 최양업 신부는 드디어 서울에 도착한다. 그가 서울을 떠나던 1836년 12월은 헌종 2년이었지만, 13년이 흐른 1850년 1월은 철종 원년이었다. 아직 혹독한 추위가 서울을 감싸고 있었다. 최 신부는 서울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당시 충청도에 머물던 페레올 주교를 만나러 가려 했으나, 다블뤼 신부가 중병을 앓고 있어 먼저 병자성사를 집전해야 했다. 그리고서 페레올 주교에게 가 보니 그 역시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 만남 또한 꼭 하루였다. 최 신부는 잠시도 쉬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떠나 곧바로 전라도를 시작으로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하느님 보호로 그는 6개월간 5개 도를 두루 돌았다.(최양업 신부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1년에 120곳 안팎 교우촌 방문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 하지만 누구나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바닷속처럼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부르심의 길은 '보고 들을' 준비가 돼 있는 자에게만 열려 있다. 최 신부는 그 부르심을 따라 빛의 길을 걸었다.

 

사제품을 받은 지 불과 8개월. 중국 만저우대목구 차쿠 눈의 성모 성당에서 겨우 '보좌' 꼬리표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사제였지만, 당시 조선대목구엔 몇몇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을 빼고는 사제가 없다시피해 최 신부가 사목 순방해야 하는 지역이 5개 도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그의 본당사목구는 경기ㆍ충청 일부 지역과 전라ㆍ경상ㆍ강원도 전역을 망라하고 있던 셈이다.

 

5개 도를 따라 부르심의 외길을 최 신부는 걸었다. 6개월간 교우촌을 순방하며 박해로 숨죽이며 살아온 교우들을 다독이고 성사를 베풀고 미사전례를 집전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를 받으며 걷는 길이었지만, "아주 고약한 서양놈"이라거나 "프랑스놈", "큰 도둑놈", "선동꾼" 같은 숱한 비난을 듣고 오해를 받으며, 박해를 감수해야 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도 동포와 부모, 배우자, 친척, 이웃에게 모진 박해를 받고 가산을 포함해 모든 걸 빼앗긴 채 험준한 산속 골짜기에 들어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3년 만이라도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하며 편안히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신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최 신부는 걷고 또 걸었다.

 

이방 선교사들은 일반인들 눈에 띄기 쉬웠기에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는 지역이나 산간 오지에 사는 신자들을 찾아 돌보는 일은 다 최 신부 몫이었다. 그래서 최 신부가 사목 순방해야 할 지역은 1년에 120곳 안팎이나 됐고, 순방을 위해 해마다 2750㎞(7000여 리)를 걸어야 했다.

 

특히 최 신부가 사목 첫 해인 1850년 말까지 8개월간에 걸쳐 순방한 교우촌은 모두 127곳으로, 그가 순방한 신자 수는 3800여 명에 이르렀다. 1850년 말 전국에 산재한 교우촌이 185곳이 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공소의 68.65%를 최 신부가 감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최 신부 사목활동을 가리켜 교회사학계에선 '땀의 모범적 증거'라고 표현한다.

 

1852년 8월 중국에서 입국한 매스트르 신부와 병석에서 일어난 다블뤼 신부가 합류하면서 사목구역은 다소 줄었다. 하지만 5개 도를 순방해야 하는 사목 현실은 그대로였다. 이같은 사정은 1856년 전반기까지도 그대로 유지됐다. 1856년 후반기 들어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가 우리말을 익힌 뒤 동참하고 1857년 3월 조선대목구장에 착좌한 다블뤼 주교, 1857년에 입국한 페롱 신부 등이 잇따라 사목활동에 참여함에 따라 최 신부 사목구역은 상당히 줄어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 강원도 북부, 경상도 북부 이남 지역, 전라도 전 지역을 담당하게 됐다. 그럼에도 그의 사목구역은 5개 도 모두에 걸쳐 있었고, 공소 또한 100곳이 넘었다. 그야말로 '길의 사도'였다.

 

 

'문봉리 동골'이 가장 유력

 

2001년 12월 최양업 신부 탄생 180주년을 맞아 복원된 배티 조선대목구 신학교. 신학교 교문 밖 왼쪽엔 '길의 사도'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세워졌고, 교정 안쪽에 초가 형태 신학교가 건립됐다.

 

 

최 신부의 교우촌 방문 일정은 6개월간 대체로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다만 1850년 7월 한 달 동안만 진천 동골에 머물렀다. 그래서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는 진천 동골을 최 신부의 첫 사목 중심지로 추정하고 있다.

 

귀국 초 최 신부가 서한을 쓴 곳으로는 동골 외에도 도앙골(현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과 절골 등이 등장하지만 최 신부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쓴 「최우정 이력서」 등에 따르면,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자신의 거처로 진천 동골을 배정하자 즉시 동골로 와서 몇 해를 머무르며 전교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같은 기록으로 미뤄 볼 때 최 신부는 입국 초기 최소 2년간 진천 동골을 사목중심지 겸 여름 휴식처로 삼고 전국을 순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진천 동골'이 어디인지 논란이 있다. 현재 충북 진천군 지역에서 동골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산재해 있어서다. 현재까지 거론되고 있는 진천군 동골로는 △ 진천읍 문봉리 동골 △ 진천읍 연곡리 동골(쥐눈이 동골) △ 백곡면 용덕리 동골(느릅실 동골) △ 백곡면 양백리 동골(진천 절골) △ 이월면 동성리 동골 등이 있다.

 

이 중 최 신부의 첫 사목중심지로 거론돼 온 마을은 '문봉리 동골'인데, 이 주장은 1992년 89살을 일기로 타계한 유봉열 할머니 증언이 결정적 근거가 됐다. 아직까지는 이 주장을 배척할 만한 자료는 없다. 현재 문봉리 동골에는 1999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신축한 '무아의 집'과 성당이 있는데, 이 중 무아의 집은 해마다 4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원들이 찾아와 피정을 하고 돌아가는 피정의 집으로 쓰이고 있다. 반면 쥐눈이 동골이나 느릅실 동골, 최 신부 서한 작성지로 잘 알려진 진천 절골도 사목중심지로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진천 지역 동골 가운데 어느 동골이 최 신부 사목중심지였는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진천 동골을 중심으로 한 배티교우촌이 최 신부 사목중심지가 되면서 배티에선 한국교회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난다. 1846년 병오박해의 아픔이 어느 정도 씻긴 1847년 말 페레올 주교는 한국인 사제 양성 재개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해 8월 프랑스 함대가 고군산도, 즉 현재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에 난파하는 사건이 벌어져 교우촌 순방마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신학교 설립은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신학생 3명 페낭으로 유학 보내

 

신학교 내엔 최양업 신부가 성체를 높이 들어올려 거양성체를 하는 장면이 재현돼 있다.

 

 

그러던 중 1849년 후반 최 신부를 고국으로 불러들인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생들 교육을 전담하도록 했다. 그해가 1850년이었다. 이로써 다블뤼 신부는 자신의 거처에서 개인적으로 가르쳐오던 신학생들을 교구장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게 됐다.

 

이 신학교는 따라서 이전의 예비신학교가 아니라 조선대목구장에 의해 조선교회 안에 정식으로 설립된 첫 조선대목구 신학교였다. 교육과정 면에서 보면 '조선대목구 소신학교'였다.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나 다른 지역 신학교에 유학을 보내기에 앞서 조선에 설립한 '유학준비기관으로서의 소신학교'였다. 그 내용이 페레올 주교가 1850년 11월 5일자로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 상세히 밝혀져 있는데, 당시 조선대목구 신학교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며 교육이 이뤄지는 이른바 '이동형 신학교'였다. 그러다가 1851년 11월 다블뤼 신부가 신학교 전담 사제로 임명되면서 이 신학교는 이동형에서 '정주형 신학교'로 탈바꿈한다. 그곳이 배티교우촌 신학교다.

 

이 신학교에서 최 신부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에 대한 의문은 최 신부가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4년 11월 4일자 서한에서 풀 수 있다. 이 서한에서 최 신부는 "지난 봄에 세 학생을 강남의 거룻배에 태워 상하이로 보냈는데, (페낭)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하는 내용의 글을 쓰고 있다. 이를 보면 신학교 교사나 신학생 지도, 페낭 유학을 직접 담당한 사제가 최 신부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진다. 신학교를 담당했던 다블뤼 신부가 1853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사목순방을 시작했기에 최 신부는 배티교우촌 소신학교에 거처하며 신학생들을 지도했고 1854년 3월에는 이 바울리노와 김 요한 사도, 임 빈첸시오 등 세 신학생을 페낭 신학교에 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신학생이 페낭으로 떠나면서 조선대목구 소신학교로서 배티신학교의 역할은 사실상 소멸된다. 다블뤼 신부의 사제양성은 계속됐지만, 이 시기에 이미 매스트르 신부가 설립한 '배론 신학교'가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12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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