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3 주간 수요일 - 홀수 해 콜로새 3,1-11 루카 6,20-26
2011. 9. 7. 등촌3동
주제 : 저 위와 아래 / 세상과 천상
사람은 땅 위에 살면서도 땅위의 것들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만 만족하고 산다면, 물신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유물론으로 발전하게 될 거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과는 관련이 없게 살아가거나,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 그 신앙을 드러내지 않고 살고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우리 본당의 모습만 봐서는 과장만은 아니고,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 될 것입니다. 교적에는 3천5백 명이 넘지만,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1천명 안팎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도 물질의 한계(=물질의 힘)를 극복하는 삶이 쉽지는 않다는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행복과 불행의 대조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모인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오늘 처음 듣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흔히 아는 사고방식과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젠가 미래에 하느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으니 그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길까요? 세상에서 부자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가졌으니, 이제는 잃을 것을 걱정해야하는 불행한 사람들일까요?
한 가지 표현 안에 우리가 여러 가지 의도를 담기는 힘든 일입니다. 나름대로 행복과 불행을 구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다고 믿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그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행복과 불행을 이러한 방법으로 대조시키면 알아듣는 우리의 지혜가 좀 더 발달할까요? 역설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찬찬히 생각해봐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사도는 콜로새교회 공동체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구별해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만, 저 위 하느님나라에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될까요? 그에 대해서 말로 알아듣는 몇 가지만 챙기면, 이 땅에 발을 대고 살면서도 하느님나라에 일치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 곱쳐 질문하지만, 대답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옛 인간을 버리고 새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그 의미라고여러분은 해석하시겠습니까? 모르기는 해도, 이 세상의 삶에 적용하는 기준이 다르고, 저 위 세상에 적용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한 기준을 금방 제시하기는 쉽지 않아도, 우리가 드러내는 삶의 태도가 삶의 결과를 만든다는 것은 분명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삶의 목표를 하늘에 두어야 바오로사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나라의 행복에 갈 수 있을 것입니다.
0
538
0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