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교회 역사 안에서 살펴본 순교의 의미와 순교의 현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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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303

교회 역사 안에서 살펴본 순교의 의미와 순교의 현재적 의미

 

 

머리말

 

사람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끝까지 보존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온갖 보석으로 몸치장을 한 부유한 아낙네가 외진 곳에서 강도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강도가 그 아낙네에게 생명을 담보로 보석을 순순히 내놓도록 흥정할 때, 그 보석이 아무리 값나가는 것일지라도 대부분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보석을 순순히 내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게 여기는 것은 한 번 끊어지면 회생할 수 없는 생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중한 생명까지도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가치를 위해 선선히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남편의 뒤를 따라 부인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뒤따라 죽는 순절(殉節), 임금에게 죽기까지 충절을 다하는 순군(殉君) 등이다. 그리고 직장에서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한 나머지 죽음에 이르는 것을 순직(殉職)이라 하고, 우국지사나 열사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순국(殉國)이라고 부른다. 결국 자신들이 의롭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스스로 바치는 행위이다.

 

 

'순교'에 대한 용어상 의미

 

자기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을 순교자(殉敎者)라고 부른다. 라틴어로 순교는 그리스어 '마르투리온'(martuVrion)에서 유래된 '마르티리움'(martyrium)인데, 본래는 '증언' 또는 '증거'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교회 역사 안에서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의 가치를 증거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다가 피를 흘려 목숨을 바친 신앙인들을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까지 포함하는 전인적인 자기 봉헌을 통한 증거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 봉헌하는 가장 완전한 증거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봉헌에 더 한층 가깝게 동참하는 행위일 것이다.

 

사실 구약성서에 '마르투리온'이란 용어는 없지만, 하느님과 율법을 수호하다가 순교한 사례는 있다. 예를 들면, 마카베오 시대의 순교자인 엘르아잘은 거룩한 율법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태형으로 목숨을 잃었고, 또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는 율법이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일곱 아들들과 함께 목숨을 내놓았다. 복음서에서는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뜻을 따라'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자발적 행위와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파견되셨음을 밝히셨다(요한 10,18; 18,37; 마태 20,28; 16,21). 그리고 사도행전(22,30)에서 스테파노의 순교를 전하는 루가에 의해 '마르튀로스'(증거자)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스테파노 부제를 최초의 그리스도인 순교자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성서에서도 순교란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따른 일상적인 삶의 증거가 아니고 피로써 증거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순교의 본질

 

위와 같은 박해 상황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였다. 그 가운데 교회가 공적으로 순교 사실을 인정하여 순교록에 그 신분이 밝혀진 순교자들도 있고 그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무명의 순교자들도 있다. 그러면 교회에서 공적으로 순교 사실을 인정하는 순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 본질이란 이미 위에 언급된 대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복음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며, 그 신앙의 진리를 공적으로 수호하며 증거했기 때문에 스스로 죽임을 당할 때 순교로 인정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죽음)이라는 벌이 (사람을) 순교자가 되게 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이유가 순교자 되게 한다."(시편 34편 해설)라고 하였다.

 

 

순교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믿음을 위한 피 흘림의 증언'이라는 순교의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35-107년)에게서 나타났는데, 그는 순교가 고통과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모방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순교가 순교자들의 용기와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 힘의 결과이며 하느님 은총의 열매라는 내용이 부각되면서 순교의 의미가 신학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내용은 "하느님께서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고린 4,7-1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이미 언급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를 '제2의 세례'라고 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15년)는 순교자의 고통 속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장된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순교자의 생명이 완전함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충만함이기 때문에 자기 욕구들에 대한 포기는 실제의 피 흘림과 똑같은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오리게네스도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양심의 일상적인 순교라고 보았다. 그리고 올림푸스의 주교 메토디오(?-311년)도 인내심을 가지고 동정(童貞)을 간직한 처녀는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다는 점에서 순교자의 영예에 비견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194-264년)는 전염병 환자를 기꺼이 돌보다 죽은 경우도 순교자로 보았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중세 시대에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백만 명이 죽어갈 때 환자들을 간호하다가 같은 병에 걸려 병사한 수많은 수도자들과 신자들도 순교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박해자와 순교자의 동기의 양면성

 

교회 역사 안에서 많은 경우에 박해자의 박해 동기와 목적이 순교자의 동기와 목적과는 서로 다른 양면성을 보여 주고 있다. 로마 제국에서의 첫 박해의 주범이었던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박해의 황제인 디오클레시아노(243-305년)에 이르기까지 박해의 근인(近因)과 원인(遠因)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에 따라 동일하지 않았다. 대부분 박해자의 정치적인 목적이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피상적으로 종교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 예를 들면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신(神)들의 의인화와 황제의 신격화(神格化)로써 황제들이 자연스럽게 신들의 반열에 오르면서 황제신(皇帝神) 숭배를 애국심과 동일시하여 강요하였다. 그들은 황제신 숭배로 제국의 일치를 도모하고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국력을 신장하려 하였다. 이 때문에 하느님 한 분만을 참된 신으로 믿고 흠숭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황제신 숭배와는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곧 정치적인 야심을 종교적인 요소로 포장한 박해자의 동기와 목적에 비해 순교자들의 동기와 목적은 주님을 위한 신앙으로 순수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나는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매달고 또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며 이 동네 저 동네로 잡으러 다닐 것이다."(마태 23,34)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초기의 역사는 거의 예외 없이 박해를 받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곧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하느님께 봉헌되셨고, 스테파노 부제, 두 야고보 사도, 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도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쳐 순교하였다.

 

로마 제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자마자 폭군 네로(54-68년) 황제가 로마 화재 사건의 주범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떠넘기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에서 신앙의 자유를 승인하기까지 로마 제국에서 300여 년 동안 계속적으로 일어난 박해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해 순교하였다. 그러나 테르툴리아누스가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인의 씨앗이다."라고 고백한 대로, 박해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더욱 정화되고 굳건해졌으며 결국 이 순교자의 피는 또한 그리스도교의 밑거름이 되어 이렇게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왜냐하면 신앙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눈앞에 둔 신자들이 세속적 불순한 동기가 전혀 없이 가장 순수하게 하느님 한 분께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하느님을 선택한 그 힘이 교회의 정신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 교회의 순교 사례(事例)

 

로마 제국에서 가장 참혹한 박해였고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였던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때 일어난 순교 사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298년 7월 21일, 틴제스(Tinges)의 백부장(百部長)인 마르첼루스(Marcellus)는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헤라클레스 신의 칭호로 승격된 기념일을 축하하는 행렬식 중앙에서,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다." 하고 외치며 자신의 계급 띠와 무기, 그리고 장교 기장을 던져 버렸다. 그런데 모든 군인들은 황제의 성대한 축일에 으레 있게 마련인 우상 숭배 의식에 참석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든지 해야 하기 때문에, 이 날은 군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을 가려내는 데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는 바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총독에게 끌려가 다시 한번 심문을 받았다. 그러자 마르첼루스는 "예수 그리스도 왕의 영원한 군사로서, 벙어리이며 귀머거리인 나무와 돌로 된 신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황제들을 위하여 군 복무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였다. 결국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어 순교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박해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로마 제국에서뿐만 아니라 근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이 처음으로 전파되는 곳이면 기존의 종교와 전통적인 문화와 갈등을 일으키면서 거의 대부분 박해가 따랐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 역사처럼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 또는 아시아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에서는 한때 그리스도교가 그 지역의 토속 신앙과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박해한 사건이 때때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식민 정책을 수행하던 현지 권력자들의 정치적인 배경도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순교의 현재적 의미

 

2000년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는 옛날과 같은 대규모 박해에 따른 순교 사건은 흔하지 않지만, 아직도 종교를 헌법상 국교로 인정하는 일부 비그리스도교 국가, 예를 들면 이슬람 국가에서는 순교로 인정되기에 충분한 박해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박해로 고전적인 의미에서 피 흘림의 순교가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앙의 자유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 그 밖의 지역에서는 순교 정신 또는 순교 영성이 어떻게 해석되고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실천될 수 있을까? 위에 이미 언급된 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배치되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를 포기하는 것도 실제의 피 흘림과 동등한 것이라고까지 생각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매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양심의 일상적인 순교라고 본 오리게네스, 그리고 온전히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봉헌되기 위해 인간적인 본능의 욕구를 자제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동정(童貞)을 지키며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다는 점에서 동정녀를 순교자의 영예에 견줄 수 있다고 보았던 올림푸스의 주교 메토디오, 그리고 전염병 환자를 기꺼이 돌보다 죽은 경우도 순교자로 간주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 등 교부들의 순교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순교에 대한 현재적 의미나 순교 영성의 생활화도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던 '사막의 교부들'은 피를 흘려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 사랑을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백색(白色) 순교'를 인정하였다. 또한 아일랜드 순교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욕정을 참으며 끊임없이 보속하는 것을 '녹색(綠色) 순교'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양자 선택의 극한 상황에서 생명을 바쳐 주님을 증거하는 고전적인 순교에 대한 가치와 피를 흘려 생명을 바치는 상황은 아니지만 매일 '온전한 정신과 온전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복음의 가치를 수호하고 실천하며 완덕을 추구하는 생활을 순교 정신과 순교 영성의 구현으로 확장 해석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첫 한국인 사제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피의 순교자'로, 그리고 피를 흘려 생명을 바치지는 못하였지만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목하다가 병사(病死)한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맺는 말

 

현재 우리 나라는 피를 흘리기까지 요구하는 순교적 박해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순교 정신과 순교 영성의 구현은 결코 소홀하게 될 수도 없고 그 가치가 축소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 시대, 그 지역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복음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도 순교 정신이 필요할 것이다. 교육은 한 국가를 위한 백년 대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실제로 그렇게 존중받고 있는가? 교육의 영역을 크게 나눈다면 가정 교육, 학교 교육, 사회 교육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가정은 사회의 기둥이며, 가정이 제대로 쇄신되고 성화될 때 사회가 개혁되고 희망적인 사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미 강조하였다. 오늘날 우리 가정은 어떤가? 가족 구성원의 관계에서 희생의 가치는 퇴색되고 편리함만이 서로의 관계를 어정쩡하게 유지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한 환송 회식에서 이른바 '좋은 말씀 한 마디'를 의례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본인은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 두 가지를 말한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서양 사람들이 지나치게 편리 위주의 생활 양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편리함 자체가 결코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편리'가 모든 생활의 중심이 되고 인간 관계도 편리함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때, 우리 사회는 너무 삭막해지고 이기주의가 더욱 팽배해지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이 편리 위주의 생활 방식이 비단 서양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교포들끼리 야외로 나들이 갈 기회가 있었다. 자녀가 셋인 한 가족에 편승해서 가야 할 처지였는데 승용차의 자리가 비좁았다. 그러자 그 집의 가장이 "애들을 둘만 낳으려고 했는데 셋이 되니까 이런 때도 불편하다."라고 불평하였다.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인 아이가 일시적인 불편함 때문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만 셈이다. 편리 위주의 가치관에는 '희생'이라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희생 없는 사랑이 도대체 가능할까? 사랑은 희생이라는 토양에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는데, 인간 관계에서 희생 없는 사랑을 얻으려 하면, 결국 일시적인 만족에 그치는 쾌락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이제 우리 자녀들에게 '희생'이란 단어가 고전적이고 고리타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는지 염려된다. 이혼율이 높아가고 결손 가정이 늘고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인 문제로 연결되고 있다.

 

학교 교육의 현실은 어떤가?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는 점은 '학생들 관계는 경쟁만 있지 협력은 뒷전으로 물러났다'든지, '학교는 입시 지옥이다'라는 내용이 아닌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새벽 한 시까지 공부하는 나라가 우리 나라말고 어디 있는가? 토요일도 주일도 없이 자율 학습과 보충 수업, 학원 보충 수업 등 몇 년을 이런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교육은 책에서 배우는 지식 차원의 것뿐 아니라 인간 관계 안에서 배우는 것 또한 포함한다.

 

놀이 문화도 전인적인 인간 성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우리 학생들에게 건전한 놀이 문화가 가능한가? 놀이 문화로써 협력과 양보의 정신도 자연스럽게 함양되는데, 그러한 기회가 가능한가? 예리한 칼을 잘 만드는 기술 교육에 치중하면서 정작 그 칼을 올바르게 다룰 줄 아는 윤리 도덕성에 대한 인문 교육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는 듯하다. 또한 가정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가정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모든 학교나 학원의 절제 있는 운영이 필요하다고 본다. 적어도 토요일과 주일은 학생들이 가족들과 또는 친구들과 지내며 공부 외의 취미 생활이나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 좋겠다.

 

사회 교육은 방송과 신문 등 언론 매체가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사회 교육의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채 수익성 위주의 선정성, 오락성에 치중하는 기획 방송이 많지 않은가? 사회적인 분위기를 올바르게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언론 매체가 제대로 그 역할과 기능을 다 하지 못할 때 우리 나라의 미래는 그리 밝지 못하다고 본다. 언론 윤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을 때 그 언론은 오히려 사회적인 흉기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 사회 교육에 대한 문제도 심각하게 인식하고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순교 정신으로 복음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도 현대의 또 다른 순교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목, 2002년 9월호, 김희중(광주대교구 금호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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