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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그림으로 읽는 교회사: 투쟁하는 인간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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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01 ㅣ No.979

[그림으로 읽는 교회사] 투쟁하는 인간의 초상

 

 

모짜르트와 베토벤

 

성실한 범인과 게으른 천재. 끙끙거리며 만들어낸 살리에리의 곡을 단숨에 그 자리에서 편곡까지 해버리는 영화 속 모짜르트의 천진난만을 보며 알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었다. 견줄 수 없는 힘의 차이, 타고났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재능,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것들 앞에서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천재성이 늘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타고난 재주와 운명에 몸을 맡긴 모짜르트보단 제 운명과 격렬하게 싸우듯 몸부림치던 베토벤처럼, 천재성 번득이는 봄날 같은 소년보단 세파에 육신이 무너졌어도 광채를 잃지 않은 중년의 눈빛이 더 마음을 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otti Simoni 1475-1564)도 그런 인물이다.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90살까지 살았다. 그것도 죽는 날까지 세상과도 또 자신과도 불화하며 치열하게 말이다. ‘신과 같은 사람’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천재임에도 중노동에 가까운 돌 깎는 일을 구도자처럼 죽기까지 수행했던 사람. 건축가, 군사전문가, 정치인, 화가, 조각가 등 그를 수식하는 온갖 이름에도 오직 ‘조각가 미켈란젤로’란 서명만을 고집했던 굳건한 자의식의 사람. 부와 명예, 그 모두를 가졌지만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고 스스로 궁핍했던 사람. 천재들의 세기 15세기 피렌체에서 그는 동시대 그 어떤 누구와도 견주기 힘든 다른 차원의 인물이었다.

 

 

그 자체로서의 예술

 

도드라진 그의 이미지는 어쩌면 그가 속한 시대의 속성이기도 했다. 15세기 이탈리아 중부에서 시작해 북상하며 전 유럽을 뒤덮었던 르네상스, 그 진원지가 바로 그의 고향 피렌체였기 때문이다. 흔히 르네상스의 의의를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정의하지만, 그래서 왠지 고상하고 관념적으로 들리지만, 예술가들에겐 매우 현실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지난 세기까지 예술은 철저히 어떤 목적에 의해 제작되던 것이었다. 의뢰인은 대개 교회였고 교리교육이든 신심고양이든 분명한 목적과 용도가 있었고 작품은 그에 부응해야했다. 작품은 누가 제작했는지 보다는 얼마나 그 목적성에 도달했는지에 따라 가치를 평가받았다. 제작자는 그래서 ‘예술가’라기보다는 동업 조합인 길드에 속한 일종의 ‘기술자’였고 대작의 경우엔 집단 창작이 당연한 일이었다. 지적소유권은 고사하고 서명조차 흔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중세가 붕괴되며 교회가 더는 정신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할 수 없게 되자 온갖 형태의 ‘자율성’이 터져 나왔다. 예술도 예외일 수 없었다. 신흥자본의 등장으로 소비층이 다양해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제 예술은 그 자체로 목적과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예술에 대한 흥미가 과거의 사람들에게 어디까지나 소재에 있었다면 이제는 작품의 형식에 대한 흥미, 곧 그 형식을 만들어낸 인격의 가치를 높이 사기 시작했다. 완성된 작품, 그 대상 자체만을 두고 평가하던 시선에서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구현해낸 정신과 인격, 예술가로 눈을 돌렸다. 작품의 설계도 격인 소묘나 습작들이 귀한 컬렉션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도, 예술가들이 작품에 서명을 남기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요동치는 시대

 

여기서도 미켈란젤로는 한참 더 나가버린 인물이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그리는 것’이라 주장했던 그는 고양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은 물론, 자신의 상념에 몰두한 나머지 명성이나 세속적 대우를 우습게 여겼고, 스스로의 재능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심지어 어떤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혹자의 말대로 그는 생에 굶주려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 도피적이고, 역사에 붙들려있으면서도 거기에 반항하던 ‘내적 분열로 신음하는 최초의 고독한 근대적 예술가’였다. 실제로 그는 동시대 작가들이 ‘르네상스적 자의식’을 뽐내기라도 하듯 저마다 자화상에 몰두할 때도 자신을 담은 단 한 점의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대개 예술이라고 하면 정적인 공간에서 시류와 상관없는 어떤 진공상태의 순수한 정신노동쯤을 상상하지만 작가 그 자신도 사실 현실의 수인일 뿐이다. 미켈란젤로는 더욱이 시대를 가르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한 세계가 무너지고 또 하나의 세상이 떠오르던 격변을, 그것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겪어낸 사람이다. 메디치가의 양자로 가문이 배출한 미래의 교황들과도 친구였지만 정치적으론 공화주의자였고 고국이 위기에 놓였을 때는 국방위원으로 일했으며 때에 따라선 몸을 피해야할 만큼 현실정치에 깊숙이 관여되어있었다. 굵직한 사건들을 도식적으로 나열하더라도 그의 시대는 줄곧 불안했다. 1494년, 근대국가로 변모해가던 프랑스의 이탈리아에 대한 헤게모니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메디치가가 축출되었고, 중년 무렵엔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의 광풍을, 1527년엔 급기야 ‘영원의 도시’ 로마가 독일황제에게 철저히 짓밟히는 초유의 장면까지 목도해야했다. 그 이후도 교회 안에 트렌토 공의회를 시작으로 종교개혁으로 야기된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려는 이른바 ‘반동종교개혁’의 기류가 들어찰 때도 교회는 여전히 가장 큰 작품 의뢰인이었기에 그 변화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실로 역사의 격랑에 꼼짝없이 갇힌 삶이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성년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1534-41 제작).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과 과장된 몸짓 등으로 더러는 전성기 르네상스를 넘어선 매너리즘 계열의 작품이란 해석도 있지만 그렇게 도식화하기엔 풍부한 현실적 모티브를 담고 있다. 흔히들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벗겨낸 가죽이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 자신이며 바르톨로메오는 다름 아닌 유독 그에게 혹독한 비평을 쏟아 붓던 문예가라며 흥미롭게 그림 속 동시대인들을 찾아내곤 하지만, 화면 오른편 막 부활하고 있는 망자들 무리 가장 밑바닥, 고개만 간신히 땅으로 내민 수도자 복장의 인물을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격정적 설교로 단숨에 피렌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사로잡았고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고부터 시뇨리아 광장에서 극적으로 화형 되기까지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도미니코회의 사보나롤라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 알렉산드로 6세를 향해 거침없이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을 쏟아냈던 그의 설교는 분명 청년 미켈란젤로에게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에겐 양부나 다름없던 ‘위대한 로렌조(Lorenzo il Magnifico)’가 인문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의 추천을 받아 직접 영입해온 설교사 사보나롤라, 그의 손에 권력자가 몰락하는 역설 앞에, 또 그런 그도 열광했던 바로 그 민중에게 떠밀려 타오르는 장작더미로 걸어 들어가야 했던 비극 앞에 그는 삶의 모순과 허무함을 이미 간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1597년 ‘허영의 화형식’이란 이름으로 온갖 사치스러운 것들과 함께 화염 속에 휩쓸려 들어간 예술품들을 볼 땐 예술가로서의 그는 또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후일 예술품에 적대적이었던 종교개혁가들이 일으킨 성화파괴의 광기를 전해들은 그였겠지만, 말년까지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생생히 기억한다고 고백하곤 했다는 사실로 봐선 이 광적인 설교가는 그에게서 사뭇 특별한 의미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공포심 너머,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보다 현현히 빛나던 작품 속 종교적 열망이 아니었을까.

 

 

투쟁하는 인간

 

최후의 심판 왼쪽 하단은 이전의 도상들의 형식을 따라 지옥의 바닥으로 떨구어지는 저주받은 사람들의 무리로 채워져 있다. 그의 종교적 열망의 총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일군의 무리 중 하늘로 감히 오르고자하는 죄인들과 날개는 없지만 천사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그들을 힘껏 저지하고 다시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다. 아래로는 끌어내리려는 지옥의 사신들에게, 위로는 필사적으로 막아서는 천사들에게 가로막힌, 그 사이에 끼인 존재들은 어쩌면 저 격변기 모든 이들의 초상이자 미켈란젤로 자신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의 자화상은 인생의 무상을 엿본 바르톨로메오 손에 들려있는 인간의 껍데기이기도 하겠지만, 더 참되고 그다운 것은 오히려 천사들을 뚫고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저 우람한 인물의 등짝에 격렬하게 일어난 근육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어느 도상학 책은 이 인물을 ‘분노의 죄를 지은 자 또는 자만심의 죄를 지은 자’로 빈곤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보단 자신이 처한 시대의 혼돈 앞에 당황했지만, 순응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투쟁하며 끝까지 자신의 운명을 밀고 나가려는 그의 정신이라고 믿는 것이 더 웅변적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한 이 시대도 그의 시대 못지않게 요동치고 매일 혼란스럽기 때문일 것이고 나의 운명도 어떻게든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겠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8년 봄호(Vol. 41), 장동훈 빈첸시오 신부(인천 교구 중1동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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