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교회문헌ㅣ메시지

2012년 전교의 달 주교회의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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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9-17 ㅣ No.465

2012년 10월 전교의 달 담화문


선교의 해와 새로운 복음화

- 내가 참으로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

 

 

교형자매 여러분!

 

1. 근래에 와서 우리 가톨릭 교회는 전세계적으로 의미 있는 행사를 연거푸 열고 있습니다. 2008년 10월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주제로 제12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이하 ‘시노드’라고 표기)가 열렸고, 2012년 10월에는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제13차 시노드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는 “신앙의 해”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이유 혹은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안에서 신앙의 열기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교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서 사도적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에 와서 새로운 복음화를 외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점에 관해서, 새로운 복음화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남미의 브라질 대표 주교님이 지난 12차 시노드(2008년)에 오셔서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큰 참고가 될 것입니다. 

 

- 남미와 카리브 연안 국가 주교회의 연합 제5차 총회는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복음 선교 현황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의 사목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 교회를 떠나는 성실한 사람들은 ‘비 가톨릭 신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사정 때문에 타 교파를 찾아갑니다. 그것은 교회가 주장하는 교의나 어떤 사목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자기네 체험 때문에 움직입니다. 어떤 신학적 이유가 아니라, 교회 안의 어떤 방법론적 문제 때문에 떠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 집단을 향해 떠나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등지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느님을 찾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교파로 들어가면, 짧은 시간 안에 그 삶의 태도가 확 달라집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격에 맞지 않는 생활 태도를 버리고 칭찬할 만한 행동 양식을 지니게 됩니다. 그들이 듣는 말씀은 그 삶 속에서 구체적인 효력을 내고, 그 내면 생활을 길러 주며, 마음속 깊이에 받아들여 소화시킨 종교적 가치들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증언하게 합니다. 

 

자, 그러면 그들이 가톨릭 신자였을 때에는 똑같은 하느님 말씀이 별 효력을 내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 머물던 때에는 찾지 못하다가 다른 교파로 건너가서는 마침내 찾아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 그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과 그 말씀에 굶주리고 목말라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 줄 능력이 있는 복음의 사도가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것이겠습니까?” -

 

신앙인들이 우리 교회를 떠나 다른 교파로 건너가는 이유에 관해 남미 현지의 주교단이 내린 결론은, 신자들이 우리 교회에서 오랜 동안 신앙 생활을 실제로 해본 “경험”, 우리 교회가 그 동안 사용해 온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다시 분석하면, 신자들 측에서는 “정말로 하느님을 찾고 싶어하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그것이 잘 안 된다는 것을 “경험”했고, 사목자들의 편에서 보면, 신자들에게 그 목마름을 채워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사용해 온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교파로 건너간 사람들의 삶에 나타난 변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남미에서는 하루에도 7천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우리 교회를 떠나 다른 교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 모든 대륙 가운데 전체 인구 대비 가톨릭 인구 비율이 가장 큰 데가 남미입니다. 그것이 1940년에는 95.2%에 달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80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하여 2000년에는 73.8%로 내려 갔고, 2010년의 통계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70% 이하가 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와 같은 가톨릭 인구의 빠른 감소는 같은 기간 개신교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대조를 이룹니다. 남미에서 1940년에 개신교 인구는 2.6%였는데 2000년에는 15.4%로 증가하였고, 2010년에는 약 20%가 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습니다. 

 

 

2. 이것은 다분히 남미 특유의 선교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지역 교회 역사 초기에는 선교사들의 말이 현지인들에게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 지역은 뱀으로 상징되는 우상 숭배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 우상에게 산 사람의 심장을 바치는 제사가 성행하였습니다. 어떤 신전을 중수하고 그것을 기념해서 치른 의식에서는 2만 명의 장정들을 희생시켜 그 우상에게 바쳤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공포 속에서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후안 디에고라는 본토인이 1530년대에 현시 속에서 성모 마리아가 뱀을 짓밟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을 계기로, 주민들이 대거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교사는 혼자서 100만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정황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적절히 가르쳐 줄 시간도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성서가 지역 언어로 번역되지도 않고 따라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거의 막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복음 없는 선교”가 이루어진 것이 화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 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으며, 그때 이 위대한 사도께서 외쳤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1코린 1,17). 그때에도 이미 세례는 받았지만 복음화는 되어 있지 않은 명목상의 신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복음과는 대조되는 인간적 지혜나 상식의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고, 그 때문에 교회 안에 여러 분파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사도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멸망한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1코린 1, 17-19).

 

 

3.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새로운 복음화”가 왜 필요한지를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오늘날 쓰이는 대로의 의미와 무게를 지니고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남미 선교 5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하신 강론에서였습니다. “이 대륙의 복음화 5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말 의미를 지니려면, 주교 여러분이 각자 소속 사제와 신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각오와 헌신으로 복음화 사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재-복음화가 아니라 새로운-복음화여야 합니다. 열정에서, 방법에서, 그리고 표현에서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서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쉽게 대하게 되고 주님을 깊이 만나서 삶이 바뀌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사제, 수도자, 평신도 등 교회 구성원 모두의 삶 속에 하느님 말씀이 더욱 널리 그리고 더욱 깊이 침투하여 빛과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까지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미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반면교사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새로운 복음화”를 주창하면서 제일 많이 거론하는 것은 사도 시대로 돌아가 그들의 정신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가 복음화를 위한 모델로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복음 없는 선교”의 문제를 겪으며, 바오로 사도께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1코린 1-2장)에서 복음 선포의 특성을 대단히 명확하게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네딕도 15세 교황께서는 1917년 강론을 주제로 한 칙서 “인류의 구원자”에서 바오로 사도를 모든 강론가들의 모범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사도께서는 당신 복음 선포의 특성을 이런 말씀으로도 표현하셨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 2, 4-5).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우리 신앙의 핵심을 어떤 인간적 지혜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성령의 언어로만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1코린 2, 9-10). 그리고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나서는 구약성서를 생각하며, 그것마저 뛰어넘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 1-16).

 

 

4.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믿음의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역할을 하든, 그 지위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오늘날 우리는 각자 처음으로 돌아가 “나는 과연 참으로 믿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우리는 세 가지 질문으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필리 2,1) 나눕니까? 이 질문에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직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늘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간질병으로 몹시 시달리는 소년을 예수께서 고쳐 주신 장면(마르 9, 14-29)이 떠오릅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그 소년의 아버지가 이렇게 간청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 아이 아버지가 한 말은 우리 모두의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이야기는 그 뒤 예수께서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넌지시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태오 복음에는 예수님의 대답이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 20).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하는 시노드, “신앙의 해” 선포 등을 계기로 해서 나온 최근의 교회 문헌들은 한결같이 신앙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관해서 제일 먼저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몇 가지 추상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신앙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남으로써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언한 대로(「교회 헌장」, 제4장) 사제뿐 아니라 교회의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는 평신도 전체는 예언자, 사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원한 삶에로 인도하며, (미사에서 포도주에 물 한 방울을 섞듯이) 매일의 노동과 수고를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섞어 넣음으로써, 인간의 눈에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행위라도 무한한 가치로 변화되게 할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온 세상에 증언할 사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성직자, 수도자를 포함한 모든 신앙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 곧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 거기 잠기고, 쉬고, 상처를 치유 받고,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12차 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서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교는 자기의 사제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처럼, 더 나아가 교회 자체가 그런 것과 같이, 남에게 말씀을 전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는 태아가 엄마의 태 안에서 보호도 받고 영양분을 섭취하듯이, 말씀 속에 들어가 거기에서 보호도 받고 영양분을 섭취해야 한다”(79항). 

 

이것은 요한 복음의 한 대목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집으로 삼는다면(새 예루살렘 성서 영어 번역본)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사람이 하루 종일 일터에서 힘들게 일하고 몸과 마음이 지쳐도, 집에 돌아오면 먹고 마시고 가족의 따뜻한 위로도 받고 푹 자고 쉬어 원기를 회복함으로써 그 다음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다시 일터에 나가듯이, 하느님의 모든 일꾼들은 날마다 그분 말씀에서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방향에서 성서 자체가 즐겨 사용하는 표상 중의 하나는 “말씀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에제키엘의 경험을 가장 표본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에제 2,8-3,4) - 예레미아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 삼킬 것이었습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예레 15,16). 

 

이런 전통 속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요한 1,14 참조)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 56-58).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들, 복음 선포의 사명을 특별히 받은 이들은 먼저 이 하늘에서 내려 온 빵, 하느님의 말씀을 배부르게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번 꼭꼭 씹어서 꿀처럼 단 그 맛과 그에 따르는 새로운 힘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사도가 되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6. 전례, 특히 성체성사는 바로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그분 안에서 살게 해주는 성사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시듯이 우리도 주님의 힘으로 살게 해줍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말씀과 성체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사실상 하나로서 서로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둘이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6장에서 유다인들과 제자들로부터 거듭되는 반대와 오해를 받으시고도 끝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성체성사를 강조하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으로서도 거기에 온 생명을 걸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생명을 주는 말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며 군중이 모두 떠나간 다음 제자들과 제자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와 시몬 베드로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나?’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6-68).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는 우리 믿음의 핵심적 내용을 “외우는 일”의 중요성에 다시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성서 말씀을 외우는 일을 강조하고(126, 146항), 신앙의 해 선포를 기해서 반포하신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자의교서 『믿음의 문』에서는 신경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 초대 교회 신자들이 신경을 외워야 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신경은 세례 때 했던 약속을 잊지 않도록 해주는 매일의 기도 역할을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경을 건네주는 예식”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강론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받았고, 오늘 한 사람 한 사람이 외운 거룩한 신비에 관한 신경은 어머니이신 교회의 신앙이 그리스도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 견고히 세워 놓은 말씀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신앙을 받고 또 고백하였으니, 이제 여러분이 정신과 마음속에 늘 간직해야 합니다. 잠자리에서도 되씹고, 저잣거리에서도 떠올리며, 식사 때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몸이 잠들었을 때에도 여러분의 마음은 늘 그것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

 

신경을 그렇게 해야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음식을 먹고 잘 씹어 삼키면 위장에서 그것을 완전히 소화시켜 우리 몸을 키우고 활력을 주듯이, 영혼의 양식인 하느님 말씀도 우선 외운 다음 그것을 되씹듯 계속 묵상하면, 그 말씀은 차츰 정신을 비추어 주는 빛이 되고 생기를 주는 힘으로 바뀝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요한 6,63)이기 때문입니다. 

 

 

7. 신앙은 언제나 하느님과의 극히 개인적인 만남에서 시작되어 공동체에서 완성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 사이의 만남도 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느 쪽에서도 수치스럽고 상처투성이인 과거를 입 밖으로 끌어내어 치유의 과정을 시작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일단 치유를 받으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누구나 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도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2012년 10월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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