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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성인의 삶에 깃든 말씀: 에디트 슈타인의 에스테르기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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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5 ㅣ No.1193

[성인의 삶에 깃든 말씀] 에디트 슈타인의 에스테르기 묵상

 

 

에스테르 왕비에게서 영감을 받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성경의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에스테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에스테르 왕비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1938년에 성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가련하고 무능한 작은 에스테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를 선택하신 임금님께서는 한없이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십니다.”

 

나치의 만행으로 긴장이 고조될수록 성녀는 에스테르와 자신을 더욱 동일시했습니다. 이 점은 1941년 쾰른 가르멜 수녀원 원장 수녀의 영명 축일에 성녀가 준비한 연극 대본에서 한층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성녀는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중개자를 찾는 에스테르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밤의 대화>라는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성녀는 에스테르를 성모님을 예표하는 인물로 보았고, 성모님을 모든 여인이 닮아야 할 최고의 모델로 여겼습니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을 성모님 그리고 에스테르와 동일시했습니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 가르멜에 입회하다

 

성녀는 에스테르와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민족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에게서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에스 2,2-4 참조). 그래서 에스테르가 왕비로 간택된 것을 다음과 같이 자신에게 적용했습니다. “임금님이 보낸 이들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임금님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찾았습니다. 저는 왕궁 뜨락으로 인도되었지만 임금님께서 제게 시선을 두시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에스테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뭔가 하려 했듯이, 성녀는 나치의 만행으로 죽어 가던 자기 민족을 살리고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민족이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에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도망치거나 멀리서 관망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부름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1933년 10월 쾰른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할 당시, 성녀는 자기 민족이 혹독한 시련을 받게 될 것을 직감했습니다. 성녀는 일신의 안위를 위해 외국으로 이민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자기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 동족의 구원을 간청하며 희생 제물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성녀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주요 동기였습니다.

 

성녀는 입회할 당시의 심경을 에스 2,14-15을 바탕으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여종으로 그분의 뜨락에 머물렀습니다. 충직한 제 숙부님께서 저를 동반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종종 왕궁을 방문해 우리 민족이 처한 위험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원수 앞에 선 우리 민족을 보호해 주시도록 임금님께 청해야 할 날이 다가왔습니다.”

 

 

가련하고 무능한 작은 에스테르

 

에스테르와 에디트 슈타인은 모두 위험에 처한 동족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과 무기력함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자신을 ‘가련하고 무능한 작은 에스테르’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에스테르에게 간청했습니다. “당신도 간청하는 두 손밖에 다른 무기가 없으시죠?” 에스테르와 마찬가지로 성녀가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사용한 무기는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그분 곁에 머물며 일치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위해 희생과 고행을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테르는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임금을 만나러 가는 일이 죽음을 자초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에스 4,16 참조). 에디트 슈타인 역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건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게 이 일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일입니다. 저는 더 이상 제 정배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아주 섬세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은 호의에 가득 차서 저를 당신의 왕홀로 가리키셨습니다. 그러자 저는 시공을 넘어 탈혼했습니다.”

 

당시 성녀가 원장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고자 하는 원의가 한층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예수 성심께 참된 평화를 청하기 위해 저를 번제물로 봉헌하게 하소서. 그래서 또다시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고 적(敵) 그리스도가 사라짐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정착되게 하소서.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예수님은 그걸 원하십니다.”

 

 

유일한 희망이신 하느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에스테르가 오직 전능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기도하고 희망했듯이, 에디트 슈타인 역시 그분께만 희망을 두고 기도에 전념하며 순교할 각오를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오직 그분만이 이 상황을 승리로 이끄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에스테르는 주님께서 왕의 마음을 돌려놓으실 것이라 확신하며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에스 4,17(12)-17(30) 참조). 결국 하느님은 에스테르의 기도를 들으시고 유다 민족을 없애려던 하만을 몰락시켜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에스테르의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던 에디트 슈타인은 가르멜 수녀원에서 자기 민족의 구원과 세계 평화를 위해 숨은 희생을 바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결국 성녀는 1942년 8월 2일 네덜란드의 에히트 가르멜 수녀원에서 친언니 로제와 함께 나치에게 체포되고, 일주일 후인 8월 9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 제물이 되어 산화(散花)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유다 민족을 포함해 인류를 피바다로 물들인 제2차 세계대전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 윤주현 신부는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대구 가르멜 수도원 원장,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과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0월호(통권 475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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