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강론자료

2011-0717.....신앙인에게 맡겨진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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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07-16 ㅣ No.1057

연중 제 16 주일(가해)
지혜서 12,13.16-19 로마서 8,26-27 마태오 13,24-30
2011. 7. 17. 등촌3
주제 : 신앙인에게 맡겨진 임무
세상에서 우리는 많은 질문을 하고 살아가지만, 질문에 비해서 대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왜 태어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하는 일반적인 질문도 있고, 과연 하느님은 존재하시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면 세상에는 왜 고통이 있고, 왜 힘겹게 사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제가 질문의 본보기로 6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질문 외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아주 많습니다. 대답을 얻고 싶은 질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도 많다는 말뜻도 될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 올 여름의 장마는오늘까지라고일기예보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 들어서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일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탓이고, 사람의 일은 미루면 손해를 보지만 하느님의 일은 미룬다고 해도 내가 세상살이에서 손해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탓입니다.
 
7월의 세 번째 주일은 농민주일로 기억해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식량을 생산하는 일에 애쓰는 사람들을 돌아볼 것을 권하는 날입니다. 우리들처럼 도시에 살고, 웬만해서는 흙을 밟아보기 힘든 곳에 사는 사람들이 농민주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렸을 때에 배웠을 법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도 이제는 무색해진 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힘들고, 저렇게 살아도 힘들다고 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은 경제와 돈 논리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에서도 올바른 남들에게 말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들은 [] ‘밭에 난 강아지풀로 번역되는 가라지와 관련된 비유 이야기는 식량을 생산하는 일과 세상사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과연 어떻게 행동하실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늘 선하신 분이고, 모든 것을 참아주시는 분이며,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축복을 베풀어주시려고 기다리는 분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하느님은 변하지 않아야 할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정말로 하느님이 그렇게 움직인다면 좋다고 하겠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움직이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신학에 따른 설명을 하자면, 악은 존재가 아니고, 선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 선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선과 악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는 신학은 사람이 현실을 대하는 자세를 아주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과 악에 대해서 신학과는 다르게 해석하는 세상에서는 우리가 도전하기만 하면, 선한 사람은 악인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합니다. 정말로 가능할까요?
 
오늘 복음에는 씨를 뿌리는 선한 사람과 그렇게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는데 방해하는 악한사람이 등장합니다. 뒤에 등장하여 강아지풀 씨앗을 좋은 밭에 뿌리고 간 자를 악인(惡人)이라고 말한다면, 그 악인에 앞서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선한 사람의 무리에 나는 과연 들어갈 수 있겠는지 판단하는 것도 세상을 대하는 한 가지 자세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여 두 가지를 대립시켜 말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살이에서는 선과 악을 구별하기도 쉽지 않고 올바로 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둘의 모습이 하도 비슷해서 아무나 구별할 수 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위험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에서, 훌륭한 주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좋은 것에서 나쁜 것만 구별하여 그것만 없애려고 하다가는 선한 것조차도 죽여 없앨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악은 선을 완전히 감싸고 있기 때문이고, 선은 악 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의 표현입니다만, 악은 선처럼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람의 한 부분이 되어 철저하게 우리들과 함께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 악의 힘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것도 신앙인이 해야 할 일의 한가지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악의 힘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악에 신경을 쓰는 시간만큼 선을 더 많이 실천해야 한다는 소리로 알아듣는다면 아주 훌륭한 자세가 될 것입니다.
 
지혜서를 쓴 이는, 하느님께서 언제 우리 곁에 나타나시는지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완전한 권능이 불신을 받을 때에만 힘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아는 이들에게는 그가 가진 오만한 자세를 질책하신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세상살이에 지쳤다고 말하면서, 이제 죽어도 좋으니까, 하느님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면, 그 세상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 그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이 세상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우리 마음대로 다루어도 좋다고 그냥 맡겨두실까요? 혹시 우리를 쫓아내지는 않으실까요?
 
힘들다고 말하는 세상, 어떻게 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 쉬운 세상을 그냥 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아주 나쁜 일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부터 이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지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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